덩케르크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속죄’에는 어린 소녀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끌려와 전쟁에 종군하게 된 로비 터너(제임스 맥어보이役)란 인물이 등장한다. 프랑스-영국원정대의 참담한 패배와 함께 벨기에 전선에서 파드칼레까지 후퇴하는 고난의 길, 그리고 휴양도시 덩케르크에서 탈출선을 기다리며 혼수상태 빠져가는 장면이 내가 전쟁사가 아닌 문학과 영화로 처음 접한 덩케르크 후퇴 작전이었다.

 만약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였다면 ‘로비 터너’ 같은 인물 몇을 중심으로 덩케르크의 충격과 공포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후위를 지키다가 전멸한 소총연대 병사들과 연안여객선 지붕 위에서 독일 전투기를 향해 경기관총으로 응사하는 외로운 수병들. 의연한 모습으로 최악의 전쟁터를 향해 떠나는 항해가들을 내세워서 말이다.

스필버그와 달리 놀란은 덩케르크 후퇴 작전 속에서 그의 출세작인 ‘메멘토’를 복기하게 할 법한 연출로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을 이용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파드칼레에서 해협 너머 고향까지 모든 중장비를 잃고 버려진 군인들의 일주일과 도싯같은 항구 도시에서 덩케르크의 군인들을 구하기 위한 민간 항해사들의 하루, 그리고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탄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축은 덩케르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결국에는 만나고 적층되며 거대한 서사로 이어진다.

사실 놀란의 연출에서 더 좋았던 점은 왜 히틀러는 릴에서 독일군을 정지시켰는지, 덩케르크 후퇴의 성공이 핼리팩스같은 유화론자와 처칠같은 강경론자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막고, 결국 영국이 홀로 유럽에서 독일 상대로 투쟁하게 되었는가 따위의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거대한 규모의 영화에서 공중전과 말미에 등장하는 몇몇 제외하면 적군인 독일군은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라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귀향을 가로막는 존재론적 개념에 가깝고, 이야기 초반 3기의 스핏파이어 편대와 소형 보트가 가로지르는 영불해협은 오히려 적막하다. – 실제로 후퇴 작전이 있었던 시기에는 독일 폭격기의 공격과 해협을 바쁘게 오가는 배들로 혼란 상태였다고 한다-

‘핑키 블라인더스’의 킬리언 머피는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정신이 망가진 장교로 등장하고, 스핏파이어 조종사인 톰 하디는 파일럿 고글에 가려진 눈동자만으로 최선의 연기를 선보인다. 왕년의 멋진 불륜남 전문배우였던 마크 라이런스는 말수는 적지만 단호한 캐빈보트 선장으로 분한다. 무엇보다 덩케르크 부두를 지휘하는 해군 중령 역할을 맡은 케네스 브로너의 스틱스강을 건너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셉션 이후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던 놀란의 영화.

La La Land

내가 가진 엠마 스톤이란 여배우에 대한 이미지는 주홍 글씨를 뜻하는 ‘A’를 옷에 매단 틴에이지 무비로 결정되었다. 그 후로 그녀가 어떤 영화를 찍든 관심이 없었다. 1997년 3월 알란 파커의 에비타를 본 이후에 생긴 뮤지컬 영화는 별로라는 편견, 거기에 ‘노트북’ 이후 쭉 싫어하는 또 하나의 배우 라이언 고슬링-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자문해 봤더니 레이첼 맥아담스 상대역이라서 싫었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조합이라면 내게는 결코 봐서는 안 될 확실한 징조였다.

지난 연말 내가 일하는 동안 아내는 홀로 ‘라라랜드’를 보았다. 설날이 다가오는 요즘까지 아내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면 늘 ‘라라랜드’를 보자고 속삭였다. 사실 애플 뮤직에서 실수로 앨범을 클릭하지 않았다면, 안개가 자욱한 춘천고속도로를 지나는 동안 반복되는 선율에 매료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징조는 분명했으니까

아이가 잠든 저녁, 성냥갑처럼 답답한 침실에서 노트북으로 아내와 함께 ‘라라랜드’를 보았다. 오리지널 스코어를 듣는 동안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아름다움이 마음속을 꽉 채운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극장이 아닌 이 좁은 방안에서 본 것을 후회한다. 음악이 좋다는, 배우들의 춤이 우아하다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마디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백 마디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대화는 이 영화의 백미다. 오랫동안 나는 소설 텍스트가 지니는 풍부함을 영화는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더구나 내가 즐겨 읽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속하는 대가들의 플롯은 너무 우월해서 결코 영화가 넘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는 기법 면에서는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과 유사하고 애틋함에서는 – 아 삼십 대 후반이 되니 더는 애틋함이 담긴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다. ‘좁은 문’의 맨 마지막 장, 제롬과 줄리에타의 대화를 읽으며 열세 살 소년이 느꼈던 그것과 유사하다고 표현하는 정도가 전부다. 사실 아내와 함께한 이래로 나는 감정의 과식 상태가 되어 이제는 애틋함이 뭔지 잘 모르겠다.-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영화는 나에게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영화이기도 하다.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에 담긴 감정의 편린들을 나 역시 이해했던 한때가 있었다는 기억은 나지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음으로.

2016년 겨울. 눈뜬 자들의 도시가 현실이 되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는 비오는 어느 선거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유권자의 백지투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원인 미상의 맹목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정부는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답게 작가는 두 이야기는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가정(한 사람을 제외하고 눈이 먼다, 보통 비밀선거에서 백지투표가 다수를 차지한다) 속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사회의 부조리함을 파헤친다. 사실 후속작인 ‘눈 뜬 자들의 도시’는 희망 따위는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최후까지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는 정부 측에 죽임을 당하고, 작가의 분신과도 같았던 개마저 죽는다.

두 책을 다시 읽었던 2008년의 어느 날에는 그래도 세상이 소설 속의 묘사처럼 극단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3년 2월에서 7월에 이르는 6개월 동안 정부는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YS와 DJ, 참여정부와 MB정권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이 정부조직은 노골적으로 우경화되었고(PC에 어긋나지만 파시스트처럼, 최소한 그 이전 정부는 친절한 정부 흉내는 냈다), 70년대 개발독재의 시기처럼 헛된 권위주의가 판을 쳤다.

2014년 4월에는 평생 잊히지 않을 ‘세월호’ 침몰이 있었고, 5월에는 바닷속에서 아이들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마음 약한 아내는 지금도 그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아울러 강경보수주의자들의 고정 레퍼토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제 북한이 도발할지 모르는 휴전 중인 국가에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실질적인 부재 상태에 있었다. 1950년 당시를 고려해보면 7시간이면 서울 이북이 점령당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뭐 1950년 그 날에 고작 서너 살 어린이였으면서도(아니면 빛도 못 봤으면서) 전쟁에 참여했다 주장하는 모 단체 회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이다.

15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였는데도 부상자와 연행자가 발생하지 않은 지난 토요일의 촛불시위를 보면서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그린 ‘도시’는 더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속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처럼 그 150만 가운데 프락치가 없었을 리 만무하고, 과격 시위꾼도 있었을 것이며, 술 몇 잔 걸친 세상이 불만스러운 성질 더러운 아저씨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백지투표’만큼이나 당황스럽다.

그만큼 사람들의 분노는 냉정하고, 현 정부는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다. 나치 부역자·친일 부역자와 같은 용례를 가진 부역자라는 표현이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축제를 즐기는 여유 내면에는 작은 빌미도 주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는 긴장감이 있다. 사람들은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고, 긴긴 겨울 추위 동안 광장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추위는 이 참여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보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기분 좋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런 분노에도 청와대를 점거하는 일은 민주국가를 부정하는 일이란 것을 사람들이 너무 똑똑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신민들이 신에게 성유로 축복받은 프랑스의 왕을 축출하는 방법과 21세기 민주국가의 시민들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홀로 공화국의 여왕이란 믿는 어떤 사람과 그 궁정귀족들의 고립된 성일 뿐 프랑스혁명 당시의 바스티유도, 베르사유궁도 아니다,

오늘 고립된 성에 사는 공화국의 여왕은 또 한 번 담화를 발표했다. 촛불로 표현되는 국민주권의 압력에 반간계에 가까운 조건부 퇴진 의사를 밝혔다. 국회가 결정한 일정과 법절차에 따라 퇴진한다는 조건. 하지만 이 또한 국민주권주의 국가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같은 의회주권주의 국가가 아니다. 국회가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된 일정을 정치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도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가 할 방안은 퇴진을 종용하고, 퇴진이 받아들여지도록 탄핵을 강제하는 방법뿐이다.

사실 또 한 번 국민주권이란 헌법상의 대원칙을 무시하고 본인의 헌법적 권리만을 찾는 자가당착의 연장 선상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울러 절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 장애의 일면을 다시 보게될 줄도. 그러면서 여당에는 탄핵 반대 메시지를 띄우고, 국회를 대상으로 치졸한 정치공작을 통해서 국면을 전환하려는 노림수를 쓸 줄도 몰랐다.

사드 배치로 우리나라의 제1의 수출국인 중국과의 밀월관계는 끝났고, 트럼프의 당선으로 대규모 재정적자가 예상된 미국 채권금리 상승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재정정책으로 미국의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인한 금리 인상과 강달러 현상도 예상된다. 당장 내년에는 국내 기준금리가 인상되지 않겠지만 미국발 금리 인상 여파로 우대금리를 제한하는 등 실질적인 금리 인상의 후폭풍이 우리한테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낙관적인 전망을 하자면 대규모 재정정책은 인플레이션과 이를 막기 위한 금리 인상, 강달러, 그리고 수입의 증가를 가져온다. 미국은 어떤 무역규제정책에도 무역적자의 폭을 키울 것이며(비관세 장벽으로 중국 것을 못 사게 하면 한국 것을 사야 한다.), 재정적자를 동반한 쌍둥이 적자의 시작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역사는 쌍둥이 적자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매번 가르쳐준다.

2016년 겨울만큼이나 2017년은 봄은 어려운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멈춘다면, 지금 마음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해방 이후 일본 부역자들을 엄단하지 못했던 전철을, 1987년 호헌 이후에도 군사주의 정권의 잔재를 지우지 못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어려워도 지금 같은 냉정한 분노와 단단함이 나 스스로에게나 내 친구들에게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짓말처럼 봄이 올 것이고,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그 봄은 춥지만 희망적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흘러 통치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정경유착이 심판받고, 지난 시간 동안 쌓인 적폐와 국기문란이 사라질 즈음에는 그때야 사람답게 일하고 대접받은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을까? ‘헬조선’이란 유행어가 사어가 될 날을 꿈꾼다. 무엇보다 백색투표를 상상했지만 결국 인간 사회는 특히 정부는 변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라마구 같은 대가에게 현실이 소설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물론 그는 영면에 들었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

만화책 ‘히스토리에’가 나오지 않았다면 플루타르크의 ‘비교 열전’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짝으로 등장하는 에우메네스가 널리 알려졌을 것 같지는 않다. 배타적인 마케도니아 제국의 권력 구조에서 그리스인 서기에서 출발해 기병대장을 거쳐 장군이 된 사람. 조금 더 운명의 여신에게 총애를 받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다면 조각나는 제국을 이어 붙었을 수도 있었을 사람. 그리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풍운아’라는 표현에 딱 적합한 인물. 그 시대 수많은 다른 인물들처럼 허상을 좇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불운한 천재. 물론 ‘히스토리에’는 이제 겨우 아홉 권이 나왔고, 이 속도로 가늠해보자면 20년쯤 지나야 에우메네스의  죽음에 이르게 될 것 같다.Untitled

사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은 에우메네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쪼개진 마케도니아 제국의 분열상을 묘사한 책이다. 하지만 불과 십여 년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어떻게 제국을 갈라먹었는지, 또 그 과정에서 덧없이 사라진 인물들과 하루아침에 폐기된 제국의 유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 극적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다. 배신과 책략이 난무한다는 점에서 ‘쌍전’은 우스운 정도이고, 이 거대한 내전은 아수라장은 그 격렬함의 근원이 신념이 아닌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권력욕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의 다른 내전과 궤를 달리한다.

저자는 알렉산드로스의 급사로 시작해 왕위를 가졌지만 통치에서 절처하게 배제당한 소년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거대한 내전을 마무리한다. 죽음 이후에나 주어진 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무덤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저자가 ‘비교 열전’ 곳곳에 흩어진 다양한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에우메네스의 삶을 서술의 시간 축으로 삼아 마케도니아 본토, 그리스, 소아시아, 아시아, 이집트의 공간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갈등을 묘사하는 실력이 압도적이다.

‘히스토리에’ 덕분에 아마도 우리는 만화가의 상상력으로 복원된 에우메네스의 ‘왕궁일지’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 이민족- 또는 열등한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받는 에우메네스의 육성으로 그의 추구했던 진짜 목적을 듣게 될지도, 어쩌면 알렉산드로스의 비밀 유언이 이야기에 가미될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앞으로 20년 동안 작가가 머리를 싸매고 이야기를 그려나갈 동안 우리는 먼저 이 책을 읽으며 나름의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맹목’의 정영목 선생의 번역은 훌륭하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 인도 원정을 위해서 후방에 남겨 둔 고집 센 노인들이 어떤 실력을 발휘해서 그의 제국을 산산조각냈는지를 음미해보는 재미도 풍부하다.

표절

오래된 사진 속에서 젊은 내 모습을 발견한다든지, 복잡한 도심에서 몇 년 새 부쩍 나이 든 대학 동기의 모습과 조우한다든지, 삶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의 흐름을 일깨운다. 내게는 이것 말고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몇 순간이 있는데 하나는 아끼는 책의 새 판본이 나오는 것하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 읽던 소설에서 다른 느낌을 받을 때다.

1994년 14살 소년에게 ‘표절’은 첫사랑에 대한 지독한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주인공 에드워드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베두인족 소녀 야스미나는 내게도 첫사랑의 환상과 같았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극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하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서는 주인공 에드워드가 빼앗겼다고 착각하는 문학적 재능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원고 냄새를 맡는 능력’에 끌렸던 것 같다

스무 살 무렵에는 복수의 도구가 되는 조작된 ‘Reprint’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끌렸으며, 복수의 대상인 니콜라가 직면한 작가라는 고된 과정에 전율했고, 그의 실제 모델이라고 밝혀진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니콜라나 로맹 가리나(혹은 에밀 아자르이든)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니콜라의 허영이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비겁함의 소산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다른 형태의 쌍둥이 형제라고 느꼈던 것 같다. 몸은 자랐지만 마음은 영원히 알렉산드리아 시절에서 멈춰버린 두 소년……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무더위 속에서 피서 삼아 읽은 ‘표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30대 후반이 되고 나니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보인다. 야스미나는 이제는 아름다운 환상이라기보다는 희생양이 된 애처로운 단역이며, 주인공 에드워드의 사랑은 이미 야스미나가 살해되기 이전에 끝났다는 사실. 니콜라의 여성 편력에서 느끼는 애잔함. 주인공의 복수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변명의 얄팍함. 두 사람 모두의 비겁함으로 뒤틀린 우정을 바라보는 안타까움 같은 것들 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도서관 서가에서 ‘표절’을 빼 드는 여자에게 청혼하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의 아내도 ‘표절’을 읽었고 재미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내가 이 음습한 복수극에 열광하는지, 주인공에게 깊게 감정이입을 하는지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제는 나도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쉽게 보기 힘든 지적 우아함이 감도는 섬세한 묘사를 읽고 있노라면 아련한 옛 소설에 대한 향수와 깊은 그리움이 밀려온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