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막을 끝내며

요즘의 나는 한 막이 내려가는 순간을 새로운 막이 올라가는 순간을 감상적인 어조로 기록해야만 한다는 심리적 당위성에 쫓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마음이면에는 지금껏 그래왔다는 습관의 관성이 존재한다. 기록하지 않은 인생이야말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비참하게 깨달은 이후에 생긴 습관은 좀처럼 기세를 꺾을 줄 모른다. 결국 습관의 노예인 나는 쉴틈 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지겨워 하며 이렇게 펜을 들 수 밖에 없는 운명인 모양이다.

하지만 막간극을 포함하여 지난 막을 돌이켜보면 꽤 괜찮은 막이 아니었나 싶다. 다시 공부하는 버릇을 되찾았고, 달콤한 사랑보다는 책읽기를 더욱 즐기게 되었으며, 사람때문에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실들로 인해 더욱 폐쇄적이고 고립화된 인간이 되기는 했지만 세상만사가 trade-off 관계에 있다는 저열한 합리성을 인정하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까닭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누리는 편안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오랜 시간 멀리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오랜 기다림과 숙성의 시기를 벗어나 성과 획득을 위해 긴장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긴장이 가져다 주는 흥분을 꺼리는 바는 아니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편안함을 좋아하고 지속적인 긴장을 피하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가 있으며 이는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내일이면 법에 의해 강제되었던 휴가 아닌 휴가가 끝난다. 새로운 막을 살아갈 준비는 이미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한번 부딪쳐 보는 것 하나뿐이다.

첫눈(’05 冬)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이야기에 담긴 종교적 상징성에 취해 있던 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목격한 것은 수북하게 쌓인 눈이었다. 전국적으로는 조금 늦은 첫눈이지만 이 지방에서는 되려 조금은 이른 첫눈이다. 하지만 소복하게 쌓이는 눈을 보고 있노라면 첫눈이 내리는 시기같은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눈에는 눈과 관련된 모든 추억을 상기시키는 놀라운 마법이 스며 있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한결 같은 영향을 미치는 마법의 성격을 더 자세하게 나열하는 것처럼 시간 낭비는 없으리라.

태어나 처음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던 집앞 뜰과 눈때문에 내린 첫번째 휴교령, 눈 내리는 날 이면 스쿨버스에서 내려 눈길을 뚫고 산 속으로 1.5킬로미터나 걸어가야 했던 학교같은 것이 생각난다.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긴눈썹 사이에 작은 물방울이 되어 녹아버린 눈의 흔적 따위를 바라보던 기쁨도 생생하다. 머리와 어깨에 내려 앉은 눈을 털어주던 손길의 당황스러움과 22살 겨울 충무로의 어느 좁은 골목길에서 당한 봉변의 아찔함 같은 것도 떠오른다. 반쯤 술에 취해 눈무더기를 던졌던 일도, 가지마다 내려 앉은 눈의 무게로 위태로운 나무 밑에서 나를 기다리던 친구에게 선사했던 아찔한 눈사태도 떠오른다.

늦은밤 핸드폰이 울린다. 10시가 넘어서 통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우리로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몽롱한 목소리는 첫눈이 오는 한밤중에 다정한 연인이 아닌 잔소리쟁이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신세가 궁색하다고 말한다. 그의 궁색이 나의 궁색처럼 여겨졌기에 유리창을 때리는 바람처럼 잠시 소슬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대화는 추억의 바다를 항행하는 선원들의 목소리처럼 주변머리 없는 문장을 주어담기 시작한다. 그리곤 이내 설령 연인이 있었더 하더라도 이 시간에 전화를 걸지는 못했을 거라고 위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친구의 말대로 연인이 없는 겨울은 심정적으로 궁핍하다. 눈 내리는 겨울밤의 산책과 키스는 연인들의 독점물이기에 우리는 감히 현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늦은밤 재미난 책을 읽으며 첫눈을 바라보는 일도, 노란 나트륨에 물든 눈의 군무를 감상하는 일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따뜻한 핫초쿄를 마시며 아이도 어른도 아닌 청년들이 나누는 수다의 재미도, 첫눈에 얽힌 에피소드를 나누며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일도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첫눈이 내린다. 나의 첫눈은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반추하는 시간이 되어버렸지만 이 하늘 어딘가에서 어떤 이들은 유쾌한 기분으로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사람 좋게 웃어본다.

P.S.
첫눈이 내릴 때면 읽는 은비령은 며칠 전에 이미 읽어버렸다.

막간극

1.
누이가 리코더 합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을 때면 난 리코더 연주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누이는 초등학생이라면 누구나 리코더 합주 정도는 해야 한다고 되려 나에게 핀잔을 준다. 사실을 밝히자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까닭은 더 이상 리코더 합주 같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피리를 불면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한다는 알키비아데스의 신념이 무의식중에 나에게도 전이되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해보지만 실상은 음치에 박치까지 겸한 음악과 거리가 먼 위인이 나였다는 설명이 옳다.


2.
M님의 글을 읽다가 주말 오전을 흘려 보내곤 했던 산책이 떠올랐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홀로인 상태를 즐겼던 그 순간이 바람 냄새, 불투명한 햇살의 추억과 함께 되살아 났다. 지난 9월에 P양에게 길을 알려준다는 핑계를 대며 슬며시 지나쳤던 드라이브 코스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음악에 취해 길을 걷다 걸음이 머물곤 했던 찻집들은 지금쯤 누구의 추억 속에 스며들어 가고 있을 지 잠시 궁금해 본다. 애플티를 마시며 짧은 에세이와 소설을 읽던 그때의 기분이 어제처럼 마음 속에 흘러 넘치는데 벌써 오래 전 이야기다.

3.
우리집에는 타로는 오컬트가 아니라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굳게 믿는 과년한 처자가 한 명 있다. 그녀의 궤변에 넘어가 사이비 신자가 되어비린 나 역시 daily reading을 즐기며 적당히 복잡한 문제 앞에서는 카드를 뽑아 무의식을 헤아려 본다. 가끔은 남몰래 연애운을 점치기도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불쾌한 결과가 나올까 두려워 카드를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타로의 정확성에는 내심 놀라곤 한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느낌들이 카드 한 장에 응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경험이 만들어 낸 78장의 과학이란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K군을 위한 카드. 난 오른쪽 카드가 나오기를 바랬는데 왼쪽 카드가 나왔다. 지금까지의 우리 관계로 볼 때 왼쪽은 다소 진지하다.

4.
사람은 저마다의 악취미가 한두개쯤 있다고 한다. 난 정도가 심한 편이라서 악취미가 흘러 넘치는 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으로 과거에 흠모했던 그녀들을 숨기는 나쁜 버릇이다. 가령 <표절>에 등장하는 야스미나나 <숨은 꽃>에 등장하는 요시에, <내 이름은 빨강>에 등장하는 세큐레 같은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악취미에는 비싼 대가가 따른다. 고정된 소설 속의 캐릭터와 다르게 그녀들은 끊임 없이 변모하고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와의 관계 역시 시시각각 틀어지곤 한다. 그리고는 이내 어떤 유사점도 없는 종막을 향해 질주한다. 결국 기표와 기의의 불일치를 느끼며 안타까워 하는 것은 순전히 나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