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

우연한 기회에 1/15으로 인하된 5.99파운드짜리 폴로진을 사게 되면서 나의 청바지 인생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20살 때 산 리바이스진 이후 두번째 진이다-  구두보다 트레이너가 더 좋아졌고 한국에서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보라색 체크 무늬의 퍼플 라벨 셔츠까지 사버렸다. -클럽 의상으로 딱이다. 하지만 이곳의 클럽이란 곳은 한국과 다르게 생겨 먹은 장소라서 그다지 발걸음을 붙잡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한국에서도 이런 장르의 유희에 대하여 진지하게 재미를 느꼈던 적은 없다- 커프링크의 부재가 안타까운 상황이긴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는 요령이 생겼고 골반에 걸리는 디자인이 안겨준 당황스러움에도 적응했다. 지금쯤 이 글을 읽고 있을 절친한 지기는 청바지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서 꼽씹어 보고 있겠지만 지난 겨울 그가 몇년 만에 청바지를 처음 산 것처럼 나에게도 특별한 이유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한 번 사봤을 따름이다.    

단상

1.
유럽 최대의 서점에서조차 한국의 대형 서점에 익숙한 우리네로서는 빈틈이 선명하게 보인다. 알파벳 순서로 잘 정리된 작가 목록에서 빠진 작품을 찾아내는 것은 여흥꺼리조차 되지 못하고 외국인 작가에 대한 무지(성과 이름이 바뀌어 있는 경우는 약과다)를 비웃는 일도 이제 지쳤다. 지금껏 내 삶을 지배한 불운 가운데 하나인 아무리 비싸도 갖고 싶은 책만큼은 절대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이곳에서도 통용된다. 막내 누이에게 <폭풍의 한가운데에서>를 선물하기 위해 런던과 옥스포드의 서점을 거의 다 뒤졌지만 헌책방 주인들에게도 아련한 추억 속의 책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의 아찔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은 여기에서도 구하기 힘든 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 역시 프리드먼처럼 반은 명작이나 반은 펄프 덩어리인 두터운 책을 써야만 하는 것일까?

2.
지금 BBC에서는 제인 에어의 새로운 시리즈를 방영하고 있다.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프로듀서가 작품을 이해하는 안목이 대단히 높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영국인답지 않게 소설의 완성도에 대해서 약간의 이견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인 역할을 맡은 매우의 입술과 뺨을 보면서 ‘소설 속의 묘사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같은 감상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드라마 혹은 리뷰 속에 담긴 플롯에 대한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고 이것들을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과거가 왜 이리 그리운 것일까? 샤롯 갱스부르의 제인에 열광했던 친구들에게 새로운 제인이 소개될 즈음에는 이런 열정도 식은 뒤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더 외로운 것이고 안타까운 것이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3.
유럽 최대의 서점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블랙웰의 문학 코너에서는 유명한 작가들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팔고 있는데 그 옆을 지날 때면 내가 사랑했던, 혹은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어제는 오스카 와일드의 너무나 핸섬한 포즈의 엽서를 사서 그 자리에서 과거와 같은 열정과 희망으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싶은 욕망에 들떠 있었고 그제는 마르케스의 엽서를 사서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대한 동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매번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 연약한 의지의 패배뿐이다. 쉽게 잊지 못한다는 것이 천형이 될 것이라는 누군가의 악담이 떠오른다. 이국만리 타역에서도 기억은 지워지지 않으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흐릿해지지 않는다. 태연한 안색 뒤에는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견될만한 기억의 징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네들이 안다면 나를 다시 사랑해줄텐데…

4.
아침에 눈을 떴을 때 BBC의 머릿 기사는 북핵 문제였다. 런던거래소에서 코스피지수의 등락을 설명하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패닉 상태까지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영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은 파이낸셜 타임즈에도 환율 정보가 실리지 않을 정도로 먼나라이다. 유럽인들이 느끼는 오리엔탈리즘의 환상에서도 매우 변방에 위치해 있다고 해야 할까? 우아한 매너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영국 신사들의 졸렬함에 질린지 오랜 터라 이제는 뭐든지 헛웃음만 나온다. 영국이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던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거인의 죽음과 함께 영국과 세계라는 단어의 연관성은 매우 약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refined gentlemen들에게 조소를 보내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국 모두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마지막 국면에 몰렸고 모두가 패배자가 되었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강한 것일까? 역사를 돌이켜 보면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윈칙에 한 국가가 영구히 종속되었던 적은 없다. 체임벌린의 실책을 누군가가 다시 저지르지 않을까? 지금의 긴장 상태를 견디어 내면서 상황을 고착화 시키는 것만이 가장 좋은 해결책인 이 즈음 누군가가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까? 유화적인 제스처는 군사적 옵션을 고려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행동이지 않을까?

어쩌면 한국인으로서 내 또래는 두번째로 동원령을 받는 발부받는 세대가 될지 모른다. 현실성이 희박한 가정이라고 매도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난 50여년간 지켜온 긴장 상태의 평화는 어느 한 쪽이 긴장 상태의 피로감을 이겨내지 못한 순간 파괴되는 위험한 평화였다. 이제 핵은 긴장 상태에 대한 피로감을 가중시켰으며 피로감을 느끼는 국가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관련국 가운데 하나가 현재의 긴장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고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거나 단호한 옵션을 선택하는 시점에 균형은 무너지며 힘의 역학 관계가 변한다. 기약없는 긴장의 피로감에 노출된 채 살아야 하는 한국인으로의 삶과 선택의 순간들이 우리가 선물받은 미래다. 뭐 한국인으로써 이제는 익숙해질때로 익숙해진 긴장의 관성을 믿자면 크게 우려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긴장을 견디어 내는 만큼 다른 나라들도 잘 견뎌줄까? 타결책이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보는 듯한 아찔함이 느껴지는 현 상태에서 우리가 가진 인내력만큼의 끈기를 그네들에게 기대할 뿐이다.

Pub

애주가에게 이곳은 좀 애매한 곳이다. 술 자체의 가격은 그리 비싼 편이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스카치 위스키를 집어들 수 있는데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서 술을 마시기에는 주머니 사정을 무시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술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술에 취해 있을 수 있는 꽤나 좋은 환경이지만 술집 자체의 들썩거림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문턱이 높다고 해야할까?

그렇다면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 이전까지 나는 술집의 소란스러움과 담배 냄새를 경멸해 왔다. 의미없는 목소리들이 만들어 내는 공허함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것을 선호하면서도  귀가 한 뒤에는 그날 입은 옷가지들을 빨래통에 집어 넣으며 욕지기를 느끼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근래에는 한국의 그 떠들썩함이 그립다. 달랑 술잔 하나를 들고 다니며 재미없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보다는 가끔은 폭탄주도 마셔주고, 기분에 따라 미친듯이 달려보는 그 분위가 그립다.

아니 가장 그리운 것은 말장난에 가까운 블랙 유머를 이해해주는 친구들과 뒷탈이 없는 술자리 특유의 묵언계가 지켜지는 한국 사회의 불량함이다. 알코올은 자제력을 일부분 제거해 주기에 보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지만 그 기회를 통해 내 성대를 울리는 말 속에는 정열이 없다. 사랑도 없으며, 그저 지껄이기 위해 열심히 입을 놀릴 뿐이다.

어찌되었건 이곳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pub를 발견했다. pub까지 가는 길에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서점을 구경할 수도 있으며 덤으로 유리창을 통해 LOEB시리즈가 가지런히 꼽혀 있는 서가도 볼 수 있다. 자제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까봐 먼발치에서만 바라보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서점의 서가와 술집의 의자 하나만큼은 집에 사들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