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겨울. 눈뜬 자들의 도시가 현실이 되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뜬 자들의 도시’는 비오는 어느 선거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유권자의 백지투표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원인 미상의 맹목 현상을 경험한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정부는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답게 작가는 두 이야기는 현실에 있을 법하지 않은 가정(한 사람을 제외하고 눈이 먼다, 보통 비밀선거에서 백지투표가 다수를 차지한다) 속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사회의 부조리함을 파헤친다. 사실 후속작인 ‘눈 뜬 자들의 도시’는 희망 따위는 없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최후까지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는 정부 측에 죽임을 당하고, 작가의 분신과도 같았던 개마저 죽는다.

두 책을 다시 읽었던 2008년의 어느 날에는 그래도 세상이 소설 속의 묘사처럼 극단적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3년 2월에서 7월에 이르는 6개월 동안 정부는 극단적으로 변해갔다. YS와 DJ, 참여정부와 MB정권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이 정부조직은 노골적으로 우경화되었고(PC에 어긋나지만 파시스트처럼, 최소한 그 이전 정부는 친절한 정부 흉내는 냈다), 70년대 개발독재의 시기처럼 헛된 권위주의가 판을 쳤다.

2014년 4월에는 평생 잊히지 않을 ‘세월호’ 침몰이 있었고, 5월에는 바닷속에서 아이들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마음 약한 아내는 지금도 그 메시지를 읽지 못한다. 아울러 강경보수주의자들의 고정 레퍼토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언제 북한이 도발할지 모르는 휴전 중인 국가에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7시간 동안 실질적인 부재 상태에 있었다. 1950년 당시를 고려해보면 7시간이면 서울 이북이 점령당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뭐 1950년 그 날에 고작 서너 살 어린이였으면서도(아니면 빛도 못 봤으면서) 전쟁에 참여했다 주장하는 모 단체 회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이다.

15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였는데도 부상자와 연행자가 발생하지 않은 지난 토요일의 촛불시위를 보면서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그린 ‘도시’는 더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속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처럼 그 150만 가운데 프락치가 없었을 리 만무하고, 과격 시위꾼도 있었을 것이며, 술 몇 잔 걸친 세상이 불만스러운 성질 더러운 아저씨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백지투표’만큼이나 당황스럽다.

그만큼 사람들의 분노는 냉정하고, 현 정부는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다. 나치 부역자·친일 부역자와 같은 용례를 가진 부역자라는 표현이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축제를 즐기는 여유 내면에는 작은 빌미도 주지 않으려고 조심 또 조심하는 긴장감이 있다. 사람들은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지도 않고, 긴긴 겨울 추위 동안 광장에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추위는 이 참여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보다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기분 좋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이런 분노에도 청와대를 점거하는 일은 민주국가를 부정하는 일이란 것을 사람들이 너무 똑똑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다. 18세기 신민들이 신에게 성유로 축복받은 프랑스의 왕을 축출하는 방법과 21세기 민주국가의 시민들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홀로 공화국의 여왕이란 믿는 어떤 사람과 그 궁정귀족들의 고립된 성일 뿐 프랑스혁명 당시의 바스티유도, 베르사유궁도 아니다,

오늘 고립된 성에 사는 공화국의 여왕은 또 한 번 담화를 발표했다. 촛불로 표현되는 국민주권의 압력에 반간계에 가까운 조건부 퇴진 의사를 밝혔다. 국회가 결정한 일정과 법절차에 따라 퇴진한다는 조건. 하지만 이 또한 국민주권주의 국가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같은 의회주권주의 국가가 아니다. 국회가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된 일정을 정치적으로 논의할 수 있어도 헌법기관인 대통령의 퇴진과 관련된 법률을 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가 할 방안은 퇴진을 종용하고, 퇴진이 받아들여지도록 탄핵을 강제하는 방법뿐이다.

사실 또 한 번 국민주권이란 헌법상의 대원칙을 무시하고 본인의 헌법적 권리만을 찾는 자가당착의 연장 선상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울러 절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 장애의 일면을 다시 보게될 줄도. 그러면서 여당에는 탄핵 반대 메시지를 띄우고, 국회를 대상으로 치졸한 정치공작을 통해서 국면을 전환하려는 노림수를 쓸 줄도 몰랐다.

사드 배치로 우리나라의 제1의 수출국인 중국과의 밀월관계는 끝났고, 트럼프의 당선으로 대규모 재정적자가 예상된 미국 채권금리 상승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또 재정정책으로 미국의 기대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인한 금리 인상과 강달러 현상도 예상된다. 당장 내년에는 국내 기준금리가 인상되지 않겠지만 미국발 금리 인상 여파로 우대금리를 제한하는 등 실질적인 금리 인상의 후폭풍이 우리한테 미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렇게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낙관적인 전망을 하자면 대규모 재정정책은 인플레이션과 이를 막기 위한 금리 인상, 강달러, 그리고 수입의 증가를 가져온다. 미국은 어떤 무역규제정책에도 무역적자의 폭을 키울 것이며(비관세 장벽으로 중국 것을 못 사게 하면 한국 것을 사야 한다.), 재정적자를 동반한 쌍둥이 적자의 시작은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역사는 쌍둥이 적자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매번 가르쳐준다.

2016년 겨울만큼이나 2017년은 봄은 어려운 시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멈춘다면, 지금 마음이 약해진다면 우리는 해방 이후 일본 부역자들을 엄단하지 못했던 전철을, 1987년 호헌 이후에도 군사주의 정권의 잔재를 지우지 못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어려워도 지금 같은 냉정한 분노와 단단함이 나 스스로에게나 내 친구들에게나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짓말처럼 봄이 올 것이고, 지금 같은 마음이라면 그 봄은 춥지만 희망적인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해가 흘러 통치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정경유착이 심판받고, 지난 시간 동안 쌓인 적폐와 국기문란이 사라질 즈음에는 그때야 사람답게 일하고 대접받은 그런 시간이 오지 않을까? ‘헬조선’이란 유행어가 사어가 될 날을 꿈꾼다. 무엇보다 백색투표를 상상했지만 결국 인간 사회는 특히 정부는 변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라마구 같은 대가에게 현실이 소설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물론 그는 영면에 들었지만…)

Banality of Evil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요즘은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란 인용문이 딱 알맞은 상황이다. 그가 어떤 정치적 입장이든 간에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안개 속에 놓여 있다. 무엇이 옳고, 잘못되었는지 설명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느 설명을 들어도 속이 개운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는 난제 앞에서 모두가 어두운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사실 요즘의 상황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실은 한국사회가 정말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토록 다양한 입장과 생각이 수면 아래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리고 누구나 정의와 정당함을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 담긴 것은 적당한 순도의 진실과 자기기만 혹은 자가당착에 불과한 불순물이다. 다르게 비유하자면 요즘의 문제는 19세기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나 다를 바가 없다.

폴 존슨은 모던 타임즈에서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프랑스 사회를 분석하면서 다양한정치적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사회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논의가 불가능했던 이유를 각자가 다른 사유체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같은 단어를 놓고도, 같은 사실을 보고도 서로 다른 사유체계 안에서는 그 의미가 달랐기에 원활히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은 오늘날의 우리나 같았다. 개개인이 지닌 태도는 신념을 결정하고 그 신념은 사유체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사유체계는 정치적 의사결정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다. 문제가 수면으로 부상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모른 척할 수 있었던 이 사실을 더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다. 요즘을 통해 우리는 각자가 지니고 있었으나 의식하지 못했던 정치적 태도를 각성했고 나와 같은 태도를 지닌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다른 편으로  편 가름을 냈기 때문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은 누구든 그가 감내할 수 없다고 믿는 야만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고, 이웃과 친구의 낯선 표정과 마주하고 있다. 또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전투가 벌어지는 내전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가 입은 상처는 내전이나 다름 없으며 이 상처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다. 우리가 적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과거 한나 아렌트가 표현했던 ‘banality of evil’ 밖에 없다.

결국, 소소한 결론은 이렇다. 일단 다양한 정치적 인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앞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인종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적용되는 기준은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에 따른다. political racism에 해당할 수 있는 발언은 삼간다. 설득하거나, 설득당하거나, 설명하거나, 논쟁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멋진 상대주의인가? 또, 이 얼마나 고결한 evil of banality인가? 우리 모두 이제는 ‘웃는 남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이 세상은 또 얼마나 우아한가?

Guide to Plutarch’s Lives(Greek)

신화시대:

  • 테세우스

형성기

  • 리쿠르구스
  • 솔론

페르시아 전쟁

  • 데미스토클레스
  • 아리스티데스
  • 키몬

펠로폰네소스 전쟁

  • 페리클레스
  • 니키아스
  • 알키비아데스
  • 리산데르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알렉산더 등장 이전까지

  • 아타르크세스2세
  • 아이게실라우스
  • 포키온
  • 펠로피다스
  • 티몰레온
  • 디온

헬레니즘 제국

  • 알렉산더
  • 데모스테네스
  • 에우메네스

알렉산더 사후

  • 데메트리우스
  • 피루스
  • 아라투스
  • 필로포에멘
  • 아기스와 클레오메네스

Our Dignity

Caesar his de causis quas commemoravi Rhenum transire decreverat; sed navibus suae neque satis tutum esse arbitrabatur, neque suae neque populi Romani dignitatis esse statuebat.

Caesar. Gallic War, L4, 17

For the reasons above mentioned Caesar had decided to cross the Rhine; but he deemed it scarcely safe, and ruled it unworthy of his own and the Roman’s dignity, to cross in boats

But, Our P…..

Unconstitutionality

사실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 소원에 대해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헌법 상의 명문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법률 성립시 적법한 법률 절차를 거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행정수도특별법 같은 법안을 쉽게 통과시켜준 야당에 상당한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는 빠르게 합의할 것이 아니라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가능한 늦게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직관은 쉽게 내려지는 재능이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심정적으로는 국민 투표에 부쳐야 한다는 생각에 동조했지만 대통령이나 국회에서 국민투표에 부의하지 않는 이상 고유 재량권에 속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법관들은 관습법이라는 깜짝 놀랄 이론으로 위헌을 이끌어 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수도 이전의 필요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이 문제가 내가 가진 지식의 한도 내에서 <헌법개정권력>이 필요할 정도의 중차대한 문제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경국대전과 임시정부의 법통까지 끌어들이면서 ‘서울’의 사전적 정의까지 사용하면서까지 서울이 수도라는 불문 헌법 개념을 사용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사실 난 지금까지 지록위마라는 사자성어의 정확한 실례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지록위마라는 말을 볼 때마다 오늘이 생각날 듯 싶다. 사실 이론적으로 따져보자면 탄핵 심리 당시 인용 결정을 내릴 논리적 근거가 휠씬 많았다. 그런데 지난 번에는 기각을, 이번에는 인용을 결정했다. 한 해에 이루어진 결정치고는 솔직히 ‘중심이 없는 결정’이다.

개인적으로 인용 결정을 환영하긴 하지만 헌재가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는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하려 하고 있다. 지지율의 향방을 보고 결론을 만들었다는 느낌에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근래의 우리 사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 무엇보다도 법의 인간이자 완성된 인격체야 할 법관들 마저 기회주의의 거센 파도에 편승하고 있다는 우려에 입맛이 쓰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고 싶으면 헌재를 보라는 농담만큼은 제발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헌재의 결정은 분명 합리성의 승리다.(누가 뭐래도 이론적으로는 헌재가 맞다) 하지만 헌재와 법관들에 의한 승리는, 다시 말해 그들이 지닌 합리성으로 얻어진 승리는 아니다. 올해 있었던 두번의 결정은 법관의 양심이 여론의 향방에 얼마만큼 값싸게 저울질 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나쁜 실례가 될 것이다.

차라리 우리네처럼 profit에 따른 의사 결정을 하는 쪽이 더 양식적으로 보일 정도로 두번의 심리에서 보여준 법관의 자질은 너무나 난감한 것이었다. 결정은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나 법언에 충실하기 보다는 시류에 예민한 법관은 솔직히 싫다. 기술적 해설과 결론을 만들어 내는 능력는 법관에게 필요한 자질이 아니라 우리에게나 중요한 능력일테니까. Justice와 Business man은 분명 다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불문 헌법의 범위가 새로운 논쟁으로 등장할 것이다. 어디까지가, 어떤 내용을 불문 헌법으로 보아야 하는지, 권리와 권리가 충돌할 때 불문 헌법을 어떻게 심리에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법체계에 새로운 숙제로 던져졌다. 모험심이 많은 것인지, 우리 법에는 엉뚱함과 다양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이지 도대체 구분이 안간다. 광범위한 불문 헌법의 인정이 법치주의의 근본이 약한 우리 사회의 사법 실효성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는 예상은 가능하지만 막상 생각해 보면 불문 헌법의 예는 너무 찾기 힘들다.

Modified 11.1
근래들어 관습 헌법이란 패러디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패러디 작가들이 사용하는 관습 헌법은 오류가 있는 단어이다. 관습법 중 일부를 불문 헌법으로 인정한다는 결정과 모든 관습법이 불문 헌법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다. 법은 논리학이다. 최소한 같은 것과 다른 것은 구분해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도 헌법 재판소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다. 재판관들에 대한 비난은 가능할지 몰라도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헌법재판소의 구성과 그 사법적 판단력에 대해서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헌법제정권력을 지닌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주의에서 그 누구도 헌재의 사법적 판단력보다 더 높은 권위를 부여받은 기관이나 개인은 없다.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룰을 존중하고 있다면 헌재의 결정이 뒤집어 져야 한다는 주장은 지양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개인의 보편적 정서에 반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체계의 지속성 측면에서는 헌재의 결정은 결코 번복되어서는 안될 숙명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