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theless

2001년 9월 11일
[9/11]로 부터 3년이 지났다. 지금에야 2001년 9월 11일 오전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있는 돈 없는 돈을 모두 털어 풋옵션을 사들이겠다고 다짐하고 있긴 하지만 그 날 저녁 내가 받은 충격은 꽤나 대단했던 모양이다. WTC에서 뛰어내리던 오피스 슈트 차림의 사내와 그가 쥔 주먹에 모골이 송연해 지던 기억도 생생하다. 제2의 통킹만 사건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또 한번 전쟁이 일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쟁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놀랐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자라온 세대의 어린 시절은 세계사적 사건의 홍수에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어느 세대보다 다양한 정보를 얻을 혜택을 누려온 것 같다. 어린 시절 첫번째 전쟁으로 기억되는 이란-이라크 전쟁은 독가스로 사라진 마을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필름의 이미지로 남겨져 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몰락과 그의 아들이 처형되는 장면도 생중계로 봤고,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붉은 곰이 주저 않는 모습도, 동독의 엑소더스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도, 천안문 사태와 러시아 쿠데타도 보았으며 쿠웨이트가 이라크 군에 무너지는 장면도, 바그다드 폭격과 전차전으로 요약되는 걸프전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러시아와 체첸의 전쟁도, 유고 내전과 르완다 사태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지켜본 것 같다.

냉전의 소멸과 동구권의 몰락도, 인종 청소와 제 3세계의 군벌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전쟁도, 미국 상업은행에 찾아온 저당권의 위기와 신경제가 일으킨 거대한 버블도, 러시아의 디폴트 선언과 자칫 무너질뻔한 금융 시장도 보았다. 어린 시절 최루가스의 독한 향도 맡아 보았고 12.12에 대한 법원의 심판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에게 이런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너무나 먼 나라의 이야기거나 나와는 무관한 이야기 였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이 되기 전까지 세계는 오늘날처럼 밀접한 연관을 맺는 세계가 아니었으며 십대 소년이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의 범위도 제한적이었다.(그런데 지금이나 그때나 가지고 있는 정보량이 비슷한 것을 보면 뉴스와 신문이 정말 파워풀 하긴 한가 보다.)

그 후 3년
[9/11]은 어른이 된 내가 겪은 최초의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단순한 뉴스나 신문의 일방적인 보도이외에도 주변의 내노라 하는 석학들의 말을 경청할 기회도 많았고 걸러지지 않는 리포트들을 읽을 기회도 많았다. 누구의 잘못이던 간에 전쟁을 피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도 했고 필연적으로 우리 나라도 전쟁의 수렁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반인륜적이고 반인도적인 범죄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단지 어린 시절 수없이 봤던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기로는 [9.11] 이전의 수많은 사건들에 관하여 우리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천안문 사태를 진압한 덩사오핑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고(어린 나에게는 탱크로 시위대를 으깨는 장면이 이라크 전쟁보다 백배는 더 잔혹했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잔악한 민족 분규에 열변을 토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사실 정의로 따지면 이쪽이 더 시급하다) 하지만 이라크 문제에 관해서 라면 다들 정의에 몰두한다.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에서 신랄하게 부시 행정부를 공격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역설하지만 선뜻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귀에 들어 오는 것은 어느 쪽이 정의인가 하는 지리멸렬한 논쟁이 아니라 전쟁의 실질적인 영향력이다. 적군파의 활동이 왕성해지고 네오 나치즘이 부활하면서 테러리즘이 사회와 경제의 불안 요소로 작용하리라는 의견이 개진되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국제 테러리즘의 광기를 가볍게 판단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국제 테러리즘은 확실히 경제에 암운을 드리우는 불안 요소다.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요 하나가 국제 유가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리고 유가라는 하나의 변수에 한국 경제가 받은 압력은 상상이다. 유가가 어느 가격대에 머무르냐에 따라 우리나라의 경제 전략과 각종 예상치는 매우 달라진다. 단지 유가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치뤄야 하는 대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하고 커다란 피해다. 피해갈 수 있다면 피해가야 하고, 피할 수 없다면 빠르게 마무리 지어야 하는…

변화한 세계
90년대의 세계는 빠른 속도로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원칙이 자리 잡았다. 화폐와 기술, 상품의 교류는 장려하지만 인적 교류에는 소극적인 새로운 윈칙이 북미권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상품이나 기술은 위험하지 않지만 사람은 위험하다는 생각은 테러리즘이 가져온 가장 큰 손실이다. 자국민 우선주의와 보호주의가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되면서 외국인들을 보는 시선은 싸늘해 졌고, 인적 교류를 위한 장벽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테러리즘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깨긴 했지만 우리 나라 같은 약소국들은 냉전 시대보다 더 초강대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외교에는 많은 배려와 반대급부가 제공되어야 하지만, 전쟁과 제압을 목적으로 하는 외교에는 압박 하나면 충분한 법이다. 그리고 미국의 맹방이라는 이유로, 분단 국가라는 이유로 이런 외교 정책에서 가장 큰 희생양이 된 나라 중 하나가 우리라는 것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9/11]이 종결된 사건이 아닌 현재 진형형이라는 데 있다. 아직도 세계 경제와 외교는 [9/11]의 후유증과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3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어느 것 하나 명쾌하게 해결 된 것이 없다. 전쟁은 끝을 모르고 이어지고 있고 전쟁이 가져다 준 불안정한 환경은 이제 만성이 되고 있다.

미국 대선이 중대 변수로 떠오르고 있긴 하지만 모든 것을 잊고 [9/11]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촘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적이나 제왕이나 발을 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면서 불확실성만 증대된 세계.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 흘리며, 고통 받은 지난 3년 동안의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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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그리 나쁜 성과는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한 건의 암살 사건이 빨아들인 유혈과 고통보다는 적은 셈이니까. 어떤 경우던 역사는 발전한다는 이상한 논제를 증명하는 실례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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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기각에 관하여

누가 그들을 최후의 양심이라 불렀던가?
지난 금요일 10시 30분. 법익을 논하는 헌법재판소장의 주문는 듣는 순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용기 없고 생각이 짧은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장기적인 법익과 단기적인 법익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저들이 살아온 시대가 배부른 시대였던가?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라 평할련지 모르겠지만 이번 헌재의 결정은 헌법 수호 기관이 헌법 자체를 유린한 첫번째 케이스로 연구될만 하다. 물론 법관의 양심이라는 또 다른 헌법상의 원칙에 의하여 책임은 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번 헌재의 주문에 담긴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통치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재확인 한 것이 첫째이고, 두번째는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법익 개념이 아니라 법익의 기술적 해석 기법을 심리에 적용시켰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두 가지 배경으로 도출된 결론은 [위헌성은 있으나 종국적 결정(즉 파면)을 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이다. 그리고 이런 결론으로 부터 외연되는 또 다른 원칙은 [일부 초헌적인 행동이 있더라도 직위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크다면 일부 초헌적 행동으로 파면되지는 않는다]란 원칙이다.

가장 나쁜 결론
헌재의 판결을 듣는 순간 키케로의 카탈리나 탄핵 연설에 대한 카이사르의 반대 연설이 생각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Senatus Consultum Ultimum 를 사용하는 이가 키케로라면 나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세에 이것이 독재자가 로마를 억압하려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면 누가 이 것을 견제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Roh 는 키케로가 아니며 키케로와 비교될 만한 인물도 아니다. 하지만 상황만큼은 여러 모로 비슷해 보인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사실상 독재자와 무능한 대통령일지라도 임기를 실질적으로 보장받게 하는 기판력을 지닌다. 한마디로 내란 선동이나 친위 쿠테타,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는 침략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가 어떤 대통령인가에 상관없이 임기를 채울 수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그가 어떤 대통령인가?]로 돌아가자. 만약 국군통수권과 국가의 최고 집행력을 지닌 대통령이 위에 언급한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누가 그를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 혹여 이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후세의 어떤 대통령이 독재로 국민을 억압한다면 누가 국민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인가? 통치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천명하는 헌재일까? 국민의 의사에 반한다는 논리로는 증명 불가능한 법원을 기각 사유로 삼은 헌재가 과연 우리를 보호할 수 있을까?

조용한 재야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여야 할 재야가 너무 조용하다. 80년대 피와 땀으로 이룩해낸 성과물이 이렇듯 허무하게 사라지는 데에도 모른척 방관하는 재야의 태도가 사뭇 이상스럽다. 헌재의 판단이 비겁하다는 작은 외침조차 없다. 사실상 이번 헌재의 결정으로 9차 개정 헌법 과정에서 성취한 대통령제에 대한 견제 기능이 상당수 유명무실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재야는 스스로에게 배반당하고, 또 스스로를 배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믿을 수 있다 착각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나서는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이번에는 스스로의 신념을 배신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독재로 가는 길을 또다시 열어 놓았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독재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야할 재야의 침묵은 무슨 이유일까? 가장 최선의 방법은 피를 흘리고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법이라는 사소한 진리조차 모를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던 것일까?

헌재가 바보가 아니라면..
사실 탄핵 문제에 있어 최선의 해법은 탄핵 심리가 착수되기 전에 대통령 자신이 사의를 표명하는 것이었다. 헌법 명문에 규정되고 있지 않지만 법은 지켜야할 최소한이지 지켜야 할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어른이라면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 사의를 표명함이 마땅하다. 헌법에 대통령의 탄핵 절차를 특별하게 따로 규정한 것은 헌재에게 대통령의 탄핵을 심판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대통령 자신에게 정치적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법의 정신에 부합된다.(이번 헌법에서 제외된 국무위원의 불신임 파면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정치적 선택의 기회를 대통령은 포기했고, 헌재는 헌법 기관으로써 국가의 3권 분립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심판에 맞닥뜨렸다. 그리고 심리 과정에서 국회의 공격은 최고 수준이었다. 법리싸움에서 대통령측 변호인단은 Roh를 위헌이라는 굴레에서 구해낼 수 없었다. 더욱이 소추위원에서 내놓은 카드는 헌재가 통치는 심판하지 않는다는 비겁한 원칙을 마지노선 삼아 싸우지 않을 정도로, 기술적 해석으로 죄는 있으되 벌할 만큼 중죄는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헌재가 바보가 아니라면 이런 두 가지 원칙이 가져올 여파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누군가를 이번 심판을 악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은 현행 헌법 안에서는 이제 전무하다. 결국 흐름은 필연적으로 헌법 개정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각 결정이 가져온 법익이 인용 결정으로 가져온 법익보다 큰 것일까? 단언하건데 헌법을 개정하는 것보다는 대통령 선거를 다시하는 것이 열배는 쉬운 일이다.

탄핵안의 부당성에 대한 반증

근래 들어 인터넷을 떠돌아 다니는 온갖 팜플릿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논리적 빈약함에 안타까움이 앞선다. 정치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인 국회의원의 무기속 원칙이 무엇인지,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권리가 무엇인지(국회 의원이 아니다), 3권 분립의 원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지 또한 궁금하다.

사람들은 이번 탄핵을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반대의 이유 치고는 가장 단순하며, 무지한 대답이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쳐도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 난 정말 궁금하다. 1000명 내외의 전화 조사가 국민 대다수의 진정한 의사일까? 오차가 5%가 넘어가는 통계조사의 신뢰도는 진실 혹은 거짓 정도의 유의 수준을 지닌다. 말 그대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아니 통계 조사의 신뢰성이 유의 수준 이상이라 쳐도 이천만에 육박하는 유권자가 법에 규정된 방식으로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국민의 의사가 이렇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아니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루머지만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국민의 90%가 반대한다고 해서 탄핵이 위법이고 비민주적일까? 내가 되려 묻고 싶다. 언제부터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머리수의 우세가 정의인 제도로 오인되는 전체주의였냐고? 민주주의는 정의는 머리수의 정의가 아니다. 각자 믿는 바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정의다. 소수의 의견이라고 해서 그것이 위법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민주주의를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다수의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향간에 유포되는 팜플릿들은 탄핵의 위법성 근거로 헌법 제1조를 근거로 든다. 이 팜플릿들의 저자는 아쉽게도 헌법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 같다. 헌법 제1조가 국민이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다수의 자연인이 아닌 명목적 국민이라는 사실을 식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최광의로 해석할 수 있는 헌법 제1조의 국민은 순수헌법해석 측면에서는 의무도, 권리도 없는 ‘국민’ 그 자체일 뿐이다. 왜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민의 권리는 뒤따르는 다른 헌법 조항에 의해서 보장 받는 것이지 헌법 제1조에 의해 보장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루머인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탄핵안이라 해서 헌법 제1조에 위배된다는 해석은 불가능하다. 헌법 제1조의 국민은 반대 의사나 찬성을 표명할 수 있는 행위 능력을 부여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팜플릿의 저자는 허황된 논리로 법을 유린한다. 대부분의 법학자들이 탄핵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헌법 제1조가 아니라 탄핵 사유이다.

현행 헌법에 정의된 탄핵 사유를 열거 조항으로 보는가 혹은 아닌가에 따라 탄핵이 가능한가 혹은 불가능한가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판단할 헌법적 권리를 가진 곳은 법학자들이 아니라 헌법재판소이다. 하지만 이 쓰레기 팜플렛의 저자는 마치 법학자들이 탄핵의 위법성 때문에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위법성과 가능성은 전혀 다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음 문제는 국회 기능에 대한 오류다. 국가의 구성 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지만 국가 권력은 국회, 대통령, 법원으로 분립된다. 국회가 대통령직 자체를 없애는 결의를 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는 위법 행위이지만 대통령 개인의 귀책 사유에 대한 탄핵안을 결의하는 것은 국회가 지닌 권리이자 의무다.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상호 견제 수단이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귀책 사유를 범한(그것이 이른 바 통치 행위가 아닌 개인의 부도덕과 현행법 위반이라면) 대통령의 탄핵은 정당하다.

법치 국가는 선인이다 하더라도 공동체가 정한 법률에 위촉되는 행위를 처벌한다. 선량한 사람이더라도 악한 사람이더라도, 인기가 많은 사람이던, 인기가 적은 사람이던 위법 행위에 대하여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위법 행위에 대하여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에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피고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법원은 사실과 행위에 대하여 판단하는 곳이지 개인의 인격과 인기를 판단하는 곳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탄핵을 반대하지만 난 탄핵 사유의 부당성을 적극적으로 증명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선거법 위반이라는 사안이나 부도덕성(기억력 나쁜 사람들은 취임 전에 현대통령이 표명한 측근 비리에 대한 책임을 잊어버린 것 같다)에 대하서는 꿀먹은 벙어리이고 어설픈 논리와 지식으로 절차의 위법성과 허구에 가득찬 여론조사를 토대로 부당성을 지정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과 이유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