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moil in the uncertain world

The matter of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
그린스펀의 FRB 의장직 임기 말에 터져 나왔던 논쟁 가운데 가장 뜨거웠던 논란은 부동산 버블이 2006년 하반기에 붕괴할 것이라는 크루그먼의 독설과 endless booming을 믿는 듯한 그린스펀의 다소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저금리 정책이 결국 부동산 버블을 키웠고, 인플레이션을 부추겼으며, 경기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FRB의 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묵살된 채 새로운 의장이 취임했다.

사실 논란 이후 1년 동안 벌어진 상황 전개로만 보면 크루그먼의 예언은 틀렸다. 부동산 시장의 버블은 붕괴가 아니라 서서히 침체에 접어 들었으며 FRB의 정책 기조도 인플레이션 억제로 변할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이름마저 생소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학을 다니면서 2007년 이전에 이 종류의 상품을 교과서에서 본 것은 고작 네 번에 지나지 않았다. 파이 그래프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보자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상품만한 상품. 평생 교과서 밖에서는 실제로 접할 기회조차 없을 것으로 믿어졌던 상품이 2007년 하반기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서브-프라임 시장의 붕괴가 아니라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 그 자체에 있다. 이미 90년대 LTCM이 붕괴할 때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의 취약점은 뚜렷하게 노출되었다. 한 투자가의 포트폴리오에 포함된 structured asset이 다른 투자가의 포트폴리오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다양한 파생상품이 흘러 넘치는 금융 시스템으로써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다시 말해 거래의 안정성은 쌍방 모두 거래를 청산할 의사와 실행력을 보유하고 있을 때에만 보장받을 수 있다. 상품 구조의 복잡성은 하나의 상품이 다수의 다른 상품과 결합됨으로써 보통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반면 포트폴리오 붕괴시 시장 비청산의 위험을 극도로 높인다)

결국, LTCM 사태 때는 뉴욕의 FRB의 주도하에 월스트리트의 메이저 플레이어들이 긴급구제금융을 실시함으로써 포트폴리오의 동반 붕괴를 막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그런 과단성 있는 결정을 할 인물이 없었다. 쉬쉬하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 붕괴의 여파를 축소하는 동안 이와 연관을 맺은 다양한 structured
asset product의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사실 이 시점에서 포트폴리오 자체가 붕괴하었는지 이번 주의 구제금융으로 포트폴리오의
붕괴를 막았는지는 실적 발표가 나와봐야 확실해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이번 구제금융이 포트폴리오
붕괴를 막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계속된 연타로 시작된 대출혈을 막으려고 투입된 자금이라면 structured investment business의 붕괴로 말미암은 금융 혼란은 비극의 서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SGA와 Northern Rock,  UBS등의 유럽계 은행마저 월가의 4/4분기 실적발표 이후 엄청난 손실이 예측되고 있는 참이다)

역사는 교훈적인 동시에 반복적이다. 스티걸-글래스법이 존재하던 시기. 상업은행은 저축대부조합 파동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반면
상업은행이 붕괴하는 동안 투자은행의 제2의 전성시대가 도래했고 결국 스티걸-글래스법의 사문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부동산
상품에structured된 투자 포트폴리오로 쏠쏠한 재미를 봤던 투자은행은 호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세상은 돌고 돈다.

The fantasy of emerging market
랜덤워크 마피아로서는 참 명목 없는 소견이지만 1700선 후반의 주가는 근시일에 1600선이 무너질 것 같다. 1700선 초반에서 환매 시점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하겠지만 증권사는 저가매수의 호기라든지, 장기투자의 관점을 운운하며 환매할 타이밍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다. 이머징 마켓은 미국이나 유럽 시장과 디커플링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소개와 함께 말이다. 아마도 인도 시장을
가장 좋은 예로 들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관 투자가를 중심으로 외국인 매도를 떠받칠 것이다.

하지만, 심리적 저지선인 1700은 급격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젤2 협약의 기준을 맞추고자 배당이 높으며 안정성이 높은 알짜배기 자산을 제외한 나머지 투자를 청산하거나, 포트폴리오의 붕괴를 막기 위해, 혹은 1/4분기의 실적 개선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글로벌 IB들은 2007년 동안 이머징 마켓에서 거두어들인 수익을 실현할 필요에 쫓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FTSE의 붕괴(DJI나 S&P500이 아니다)로 시장이 패닉에 빠질 경우 디커플링 경향의 강화라는 사탕발림은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 되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가장 나은 방법은 외국인 매도세를 끝까지 막아낼 지속적인 자금투입이겠지만 이 방법으로는 현상 유지는 가능해도 수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개인의 처지에서 보자면 깨끗이 손을 털고 나오는 것만이 10%의 손실이 반쪽 펀드로 이어지는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뭐 하지만 내 주변에야 간당간당한 월급 통장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친구들이 대다수이니 그리 걱정할 바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The serious problem: Raising price of the commodity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금융자산 붕괴로 말미암은 내수 시장의 위축 가능성도 중요하겠지만 소리 없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는 농작물 가격이야말로 정부차원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콩과 밀, 옥수수. 커피 모두 25년이래 최고 가격을 기록했다.(이젠 감히 ‘로부스타같은 쓰레기 원두’라는 표현을 쓸 수 없는 수준이다) 이는 밀가루와 사료. 과자류(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두부까지)등의 직접적인 가격 상승을 유발할 것이 분명하고, 이는 다시 육류의 전반적인 가격 상승을 부추길 것이 확실하다. 전자 제품의 실질적인 가격하락과 공공 부문의 빗장이 오랫동안 감추어두고 있던 물가 정책의 실패는 이번 상승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는 서민 경제의 직격탄을 날릴 것이 분명하다.

펀드에 여유 자금을 굴리는 사람들의 문제는 시장에 맡겨 놓아도 된다. 하지만,
자장면과 칼국수, 학교 식당을 애용하는 나 같은 가난한 학생이 느끼는 체감 물가는 끔찍한 고통이 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 나쁜
사실은 이런 경향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라는 데 있다. 식량 자원을 삼키는 거대한 블랙홀이 되어버린 중국. 미국
농업 시장의 판로가 식량 공급에서 바이오에너지 공급 등으로 다변화된 여파.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기상 이변은 올해에도, 내년에도 계속될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거참 걱정이다. 두부와 짜장면을 돌려 달라!

책(冊 or 責)

18세기 산문집을 읽다 보면 유난히 책에 관한 언급이 많은데 특이한 부분은 그들이 책을 얻게 되는 경위다. 오늘날의 지적권 개념으로는 확실히 불법이지만 그들은 귀중한 책을 필사함으로써 자신의 서가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아마 당시의 글쟁이라면 인세를 받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현대의 전업 작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설가나 하는 일이라고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이 지은 책을 필사하느라 바쁜 사람들을 보며 득의만만한 웃음으로 인세를 대신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더욱이 한자 한자 세필을 들고 승두세자로 밤을 새워 필사를 하는 동안 만들어지는 것은 비단 책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용에 대한 이해와 비판 역시 ‘그 와중에 슬금슬금 생겨나지 않았을까?’ 하고 잠시 상상해 본다.

물론 오늘날 18세기 방법을 답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질 세대에 태어난 우리가 무슨 인내심으로 한자 한자를 정성껏 필사하고 설령 그럴 인내심이 있다 하더라도 복사기보다 우리가 더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둠의 경로를 통해 서적 우편보다 빠르게 신간을 구할 수 있는 이즈음와서는 책의 소유라는 개념 자체의 재정의가 필요하기도 하다.

과거의 책은 필사본이든 인쇄본이든 간에 꽤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리사 자딘의 『worldly goods』에 의하면 상업 혁명 이전에 백 권 규모의 장서를 구매하려면 중산층의 경우 년 수입의 1/4을 거의 평생에 걸쳐 지출해야만 했다고 한다. -저자에게 인쇄된 자신의 책을 주는 전통은 책이 그토록 비쌌기에 증정된 책 자체가 인세로써 충분히 기능 할 수 있었기 때문 확립되었다- 그렇기에 책은 신분의 상징이 되었고, 문자 해독력이 극도로 열악하던 시기에 치자와 피치자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선이 되었다. 그 후 인쇄 프레스의 기술적 발전은 점차 서적 생산 단가를 낮추어 왔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여전히 책을 소유하는 일이 -적어도 전 지구적 기준으로는-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케임브리지 출판부와 옥스퍼드 출판부의 공인된 초판 인쇄 부수는 1,200부이다.- 책의 카테고리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세계의 영어권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놀랄 만큼 적은 부수이다. 페이퍼백의 범람에도 평범한 노동계층이 텔레비전 구매에 소비하는 생애지출보다 도서구입비가 적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문제다.

해마다 정월이 되면, 그리고 독서의 계절로 명명된 가을이 되면 서점과 책에 대한 특집 기사들이 쏟아지곤 한다. 비싼 책값과 왜 한국에는 페이퍼백이 없느냐는 불평. 대중교통에서 읽기에는 너무무겁다는 불만과 원하지 않는 하드 커버 덕분에 생긴 거품이 싫다는 이야기까지 그 불만은 참으로 다채롭다. 여기에 책은 내용을 읽는 것이지 책이라는 물건을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까지 겹치면 책에 대한 이야기만으로 일주일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니 먹물과 교양은 별개라는 논쟁은 논외로 두자. 그리고 한 번쯤은 나 역시 책에 대한 내 편견을 한 아름 늘어놓고 싶었다.

내가 과도하게 건장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은 신국판으로 제단된 하드커버쯤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돌아다닐 수 있고, 전공 서적 정도는 어디에서든 가벼운 마음으로 팔뚝에 얹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때다. 신국판에 이어 더욱 작고 가벼운 책이 오늘날의 출판 경향이라지만 난 아직도 묵직한 단위 중량을 자랑하는 미색 모조를 사랑하고, 도피지에 화려하게 인쇄된 표지를 즐긴다. 하드커버가 입혀진 사철제본을 좋아하는 것은 보관의 용이함 이전에 손에 잡히는 묵직한 느낌이 좋아서이다. 기실 사철제본이 필요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루지도 않고, 서표가 필요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사실 스무 살을 넘은 뒤로는 책값에 대한 신경도 끊은 것 같다. 책값의 상승률은 지난 20년 동안 고작 +170% 내외였다. 같은 기간에 버스요금이 +2,000% 이상 인상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경이적이다. 게다가 헌책은 그 상승률이 더욱 미미해서 고작 +150% 내외이다. 경제적 풍요가 십 년을 기점으로 배수로 커지는 세대에 속한 나로서는 책값에 예민해지는 것이 곧 심력의 낭비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십 대의 내 구매력으로는 한 권 한 권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사들여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시절의 내 시간 가치는 책값에 한참 못 미쳐서 서점에서 서서 읽는 책들이 사들이는 책들의 몇 배수였다. 하지만, 요즘의 책은 향상된 구매력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에 예전과 다르게 종이 두름을 사들이는 일에 인색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사기 전에 한참을 망설이는 가격대의 책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일 년에 고작 한두 권이니 그리 신경 쓸 일은 못된다.

8.5포인트로 시작한 내 독서 인생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크기의 활자는 9포인트이다. 내 서가에는 5만 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와 고작 500부도 팔리지 않았을 책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가끔 페이지 불리기에 당하는 책이 있으면, 필름값도 회수하지 못할 만큼 인기가 없지만 나에게는 사랑스럽기만 한 책들을 거저 줍기도 한다. 게다가 난 램지의 법칙이 책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원래 사는 사람이 적은데다가 사지 않고서는 못 배길 그런 책이 더 비싼 법이지만, 때로는 자긍심 하나 때문에 독자에게 부담을 전가시키기 보다는 베스트셀러의 수익으로 손실을 보전하는 출판사들도 많다. 그렇기에 첩첩이 서가에 쌓인 다양한 성격의 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책과 페이지 늘리기, 비싼 제본마저도 귀여운 투정쯤으로 보일 때가 잦은 것은 아닐까?

난 흡연을 즐기지도 않고, 애주가지만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으며, 차를 너무 좋아해서 항상 보온병에 그날 마실 ‘오늘의 차’를 준비해 다닌다. -그럴 여유가 되지 않는 아침이면 티백이라도 챙겨다닌다- 게다가 나에게는 시간과 애정을 요구하는 하는 어떤 이도 없다. 그렇기에 내게는 꼭 해야 할 일 이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몰두할 충분한 여유가 있다. 기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휴가는 삼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시골집으로 내려가 책이 내뿜는 그 묘한 향기에 취해 보내는 멍한 시간이다. 또 지금껏 내가 살아온 공기는 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지는 않아도 정서적으로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 내뿜는 향기로 채워져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공산이 크다.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세파에 찌든 고단한 삶만큼이나 책은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대화의 소재이다. 책이 없다면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아무리 ‘démoncratisation’ 이 시대적 화두가 된 이 시대라지만 겸손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굴종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의 리바이어던은 참주정 시대의 리바이어던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어느 시기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유로운 세상이라는 슬로건 이면에서는 ‘문혁’ 못지않은 ‘모난 돌 때리기’가 존재한다. ‘마녀 사냥’의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결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도편 추방에서 간통 혐의로, 이단과 마녀에서 이설로 끊임없이 그 명칭은 바뀌었지만 그것들은 다만 마녀의 정의가 시대에 따라 달라진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물론 아직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움츠러든 목은 펴질 줄 모른다.

빛이 오고 난 뒤에도
우리가 한 번 더 이토록 캄캄한 어둠 속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후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De Arte Dubitandi-

Guide to Plutarch’s Lives(Greek)

신화시대:

  • 테세우스

형성기

  • 리쿠르구스
  • 솔론

페르시아 전쟁

  • 데미스토클레스
  • 아리스티데스
  • 키몬

펠로폰네소스 전쟁

  • 페리클레스
  • 니키아스
  • 알키비아데스
  • 리산데르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알렉산더 등장 이전까지

  • 아타르크세스2세
  • 아이게실라우스
  • 포키온
  • 펠로피다스
  • 티몰레온
  • 디온

헬레니즘 제국

  • 알렉산더
  • 데모스테네스
  • 에우메네스

알렉산더 사후

  • 데메트리우스
  • 피루스
  • 아라투스
  • 필로포에멘
  • 아기스와 클레오메네스

갤러리와 투어리즘

2주 전 처음 이곳에 와서 놀란 것은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관람 매너였다. 이곳의 관람 매너를 자유분방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계모임과 구분이 힘들 정도로 요란한 한국의 관람 매너에 비해 절도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 주가 지나자 이런 생각이 나의 오해였음이 밝혀졌다. 중요한 것은 관람료의 경중이었다. 관람료가 비싸게 책정될수록, 접근이 어려울수록 관람 매너가 상승한다는 제2급 가격 차별의 예를 미술관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관람료가 비싼 전시회일수록 확실한 기획과 전문가의 엄격한 작품 선정이 뒤따른다. 사실 작품 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작품을 이해하는 눈을 얼마나 열어주느냐이다.  

영국의 많은 갤러리는 대체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갤러리들에서 제대로 된 감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새로운 미술의 역사’를 쓴 폴 존슨의 경고가 머릿속을 끊임 없이 떠다닌다. ‘중요한 것은 많은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걸작을 제대로 음미하는 것이다’  거대한 인파가 쉴새 없이 움직이는 갤러리에서, 더욱이 시간이라는 제약 조건 아래에서 그의 말을 실행에 옮기기는 대단히 어렵다. 결국, 갤러리에 갈 때마다 나의 좌절은 더욱 커진다. 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을 생각하며 초조함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초조함도 따지고 보면 나의 불민함이다. 갤러리에 걸린 모든 작품을 볼 필요는 없다. 아니 시간을 정해 놓고 갤러리를 모두 돌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자체가 나의 문제다. 아마도 나에게는 남은 여생 동안 이곳에 올 기회가 꽤 많이 존재할 것이다. 엄청난 규모로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은 이상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으며 한 번 들릴 때마다 이해의 폭을 넓히는 또 다른 재미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투어리즘의 대상으로서의 갤러리는 위험하다. 많은 사람들은 유럽 여행을 통해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건축물들을 바라보는 것들을 유럽 여행의 재미로 꼽는다. 솔직히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 역시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곳의 갤러리들은 투어리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투어리즘의 일환으로 갤러리를 찾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행동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의 무료 갤러리와 박물관에서 가장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무지의 향연이다. 사람들이 갤러리를 찾는 이유는 낯선 땅에 와서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보았다는 경험을 자랑하기 위해서이다. 지난주에 브리티쉬 뮤지엄에서 난 내 나이보다 세 살 아래 정도의 건장한 청년 셋을 보았는데 이오니아식과 도리아식, 코린트식의 기둥 장식에 관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던 그 전시실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느낀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에 기반을 둔 지루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도리아와 이오니아, 코린트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그 전시실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불만이었다.

문화지향은 오늘날 시대의 화두다. 하지만, 과연 양적성장을 위주로 이루어지는 문화지향이 올바른 것인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경제적 풍요는(과거에 비해서) 문화 경험의 빈도와 범위를 넓혔지만 이해의 깊이까지 넓혔는지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다.

어떤 독서론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론이 주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말대로 소설 따위는 읽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어린 벗을 보면서 문학이야말로 논픽션보다 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법이라고 설명하는 내 자신이 귀찮아졌다. 위대한 생각과 영혼을 낳는 것은 항상 허구라는 상상력에서 태어난 진실이다. 사실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사실에 불과하다. 사실은 진리를 낳지 못한다. 하지만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1미터의 책과 5만엔 돈’이라는 인용구를 듣는 순간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식의 방대함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넓게 열린 접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 자체가 생명력 없는 객체에 불과했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이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할 독서론도 있는 법이다. 어린 벗에게 무교양의 지름길을 안내하는 다카시의 독서론이 바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