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La Land

내가 가진 엠마 스톤이란 여배우에 대한 이미지는 주홍 글씨를 뜻하는 ‘A’를 옷에 매단 틴에이지 무비로 결정되었다. 그 후로 그녀가 어떤 영화를 찍든 관심이 없었다. 1997년 3월 알란 파커의 에비타를 본 이후에 생긴 뮤지컬 영화는 별로라는 편견, 거기에 ‘노트북’ 이후 쭉 싫어하는 또 하나의 배우 라이언 고슬링-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자문해 봤더니 레이첼 맥아담스 상대역이라서 싫었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 조합이라면 내게는 결코 봐서는 안 될 확실한 징조였다.

지난 연말 내가 일하는 동안 아내는 홀로 ‘라라랜드’를 보았다. 설날이 다가오는 요즘까지 아내는 여유 시간이 생길 때면 늘 ‘라라랜드’를 보자고 속삭였다. 사실 애플 뮤직에서 실수로 앨범을 클릭하지 않았다면, 안개가 자욱한 춘천고속도로를 지나는 동안 반복되는 선율에 매료되지 않았다면 결코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징조는 분명했으니까

아이가 잠든 저녁, 성냥갑처럼 답답한 침실에서 노트북으로 아내와 함께 ‘라라랜드’를 보았다. 오리지널 스코어를 듣는 동안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아름다움이 마음속을 꽉 채운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를 극장이 아닌 이 좁은 방안에서 본 것을 후회한다. 음악이 좋다는, 배우들의 춤이 우아하다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마지막 시퀀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마디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백 마디 말보다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영화의 마지막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의 대화는 이 영화의 백미다. 오랫동안 나는 소설 텍스트가 지니는 풍부함을 영화는 결코 따라가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더구나 내가 즐겨 읽는 마술적 리얼리즘에 속하는 대가들의 플롯은 너무 우월해서 결코 영화가 넘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라랜드’의 마지막 시퀀스는 기법 면에서는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과 유사하고 애틋함에서는 – 아 삼십 대 후반이 되니 더는 애틋함이 담긴 소설이 기억나지 않는다. ‘좁은 문’의 맨 마지막 장, 제롬과 줄리에타의 대화를 읽으며 열세 살 소년이 느꼈던 그것과 유사하다고 표현하는 정도가 전부다. 사실 아내와 함께한 이래로 나는 감정의 과식 상태가 되어 이제는 애틋함이 뭔지 잘 모르겠다.-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영화는 나에게는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영화이기도 하다. 라이언 고슬링의 표정에 담긴 감정의 편린들을 나 역시 이해했던 한때가 있었다는 기억은 나지만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음으로.

Atonement

이안 매큐언은 백 년쯤 뒤에는 영국 문학의 거장으로 문학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근래의 그는 초기작에서 보여주었던 광기와 비정상에 대한 집요한 집중에서 벗어나 점차 인간적이고 폭이 넓은 시선을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도리스 레싱에 이어 다음 노벨 문학상을 받을 가장 유력한 영국 작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기실 다른데 있다. 그의 소설 내포하고 있는 문제와 해결 방식이 지닌 의미에 무엇보다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이렇게 시작했지만 이 글을 소설을 위한 글은 아니다. 아쉽게도 난 이 소설의 서두밖에 읽지 못했다. 현대 영국 문학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은 학생들을 위한 해설집이 나올 정도로 유명한데 나로서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속죄』라는 제목으로 나온 번역본을 집어들기에는 이 작가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대감이 너무 컸다. 결국, 이런 저런 변명 덕분에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본 몇 개 되지 않은 작품이 되어버렸다.

키이라 나이틀리와 『스타트 포 텐』으로 얼굴을 알리지 시작한 제임스 어보이가 공연한 이 영화는 꽤 흥미롭다. 우선 금기에 가까운 덩케르크의 철수를 화면으로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지극히 세련된 표현 방식이 그렇다. 영화가 지닌 비극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은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주인공 브로니가 세실리아와 로비의 침실을 바라보면서 구겨진 시트를 유심히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무례할 정도로 상대를 무시하는 그들의 키스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굳이 마지막의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이미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그 과장이 지닌 슬픔에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과장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강한 염원이 표현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 대목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소설의 전체적인 균형보다 감동과 속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편하는 솜씨를 부린 영화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소설이 지닌 세부의 완전성 대신 절정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이완이 더 볼만하다. 다시 말해 13살 소녀였던 브로니가 이해할 수 있었던 이해의 한계와 소녀의 질투심, 감정이 거부되었을 때 소녀가 느끼는 감정의 극적인 변화. 아이가 아닌 한 사람의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는 어수룩한 생각이 낳은 태도를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결국, 무지가 악마보다 무섭다라는 격언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의 증언이 신빙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는 계급을 뛰어넘는 도전에 대한 처벌을 완곡하게 처리한 대목은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영화를 본다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눈물 나는 속죄에 감동을 하게 될 것이다. 어설프게 무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본다면 서사구조의 복잡함(다시 말해 일목연하지 않다)이라는 문제점과 캐릭터의 묘사와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든 간에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영화가 꽤 잘된 아름다운 영화라는 사실이다. 인물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 풍광 속을 흐르는 감정과 음악,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낸 배우들. 뭐 이 정도면 두 시간이 시간 낭비는 아니지 않을까?

Prime

홀로 보는 영화를 즐기는 나에게 친구는 궁상맞아 보인다는 말을 던지고는 한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과 다르게 항상 궁상맞은 것은 아니다. 궁상스런 순간은 티켓팅을 하는데 걸리는 30초 정도와 다시 불이 켜지고 홀로 극장을 빠져나오는 잠시뿐이다. 게다가 홀로 보는 영화에는 그만의 장점이 있다. 가령 마지막 한 시퀸스까지 마음에 든 영화에 동행이 기분을 상했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고, 의자에 허리를 깊숙히 묻고 음료수와 팝콘을 건내달라는 방해 없이 오롯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왜 이 영화를 보고 싶은지 상대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끔은 홀로 보는 것이 안타까운 영화가 드문드문 스쳐간다. 옆자리 앉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을만큼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영화를 홀로 보는 것은 마음 상하는 일이다. 지난 금요일에 본 Prime이 그랬다.

코흘리개 꼬맹이 시절부터 우리의 우상이었던 우마 셔먼은 여전히 gorgeous했고 거기에 더해 사랑스러운 진짜 여자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감각적인 면에서 이 영화는 막 청년이 된 소년이 성숙한 여성에게 느끼는 매력에 관한 다양한 경험들을 여기 저기에 배치해 놓았다. 하지만 스테레오 타입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은 되려 이런 가벼움 덕분에 더욱 탄력을 받는다. 우마 셔먼은 아름다운 여인을 연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연스러운 매력을 지닌 여성을 표현하려 노력했고 결국은 기발한 소재에서 비롯된 갈등 양상을 무로 돌릴만큼 사랑스런 느낌을 잘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또 이런 배경을 전제로 한 영화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관객이 이들의 사랑에 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할 여지 자체를 없애는 것인데 나처럼 보수적인 사람조차도 그들의 사랑에 이견을 제기하거나 비합리적인 선택이라 매도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스크린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반대쪽의 시선은 잘 모르겠다. 난 아직 하루도 여자로 살아보지 못했다-

사실 이 영화는 한국내 프로모션처럼 로맨틱 코메디 장르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커플들을 위한 겨울 영화도 아니다. 더욱이 트레일러처럼 소재의 기발함이 전부인 영화도 아니다. 올해 개봉된 영화가운데 가장 우아한 사운드 스코어를 자랑하지만 이마저도 이 영화를 설명하는 전부는 아니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오직 ‘사랑’ 하나 뿐이다. 하지만 매우 경쾌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사랑’을 조명해 낸다. 게다가 이 영화가 지니는 사실감은 캐릭터의 성격에 기인한다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경혐해서 비롯된다. 배우들의 섬세한 몸짓과 카메라의 움직임이 멈추는 곳에는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경험해 봤을 다양한 시선들이 녹아 있다.

그러나 정작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영화 속에 담긴 섬세한 묘사가 아니라 이들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사춘기 소년도 아닌 다 큰 청년이 타인의 사랑 이야기에 부러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이질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몰입의 정도를 넘어서 곁에서 영화가 아닌 곁에서 지켜보는 실제 사건처럼 느껴질 정도였던 듯 싶다. 아니 그 순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식탁 위에 앉아 고리타분한 표정을 짓는 감색 슈트의 남자처럼 보일 것 같아 숨이 막혀 왔다.

물론 이 영화의 이야기 흐름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매우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개연성이 부족한 장면 연결도 있고, 불필요한 시퀸스도 있다. 이야기 지루함을 방지하고 흥행을 위한 갈등 관계지만 100%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플롯은 하나도 없으며 그래서 더욱 현실감이 있다. 사랑은 결코 논리정연하지 않다. 사랑은 결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아래 첫발을 내딛는 것도 아니고 차갑고 냉혹하게 뒤돌아서며 끝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Before Sunrise’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장면 하나하나가 머리 속에 살아 남게 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비평가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도 이 영화를 보면 언제든 사랑하는 감정을 지니는 것 자체는 옳은 일이란 사실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이,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찰리와 초콜릿공장

사람들은 가끔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다시 읽고 싶어할 때가 있다. 그런 기분에 함몰되는 순간의 지인들은 곧 잘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권해달라고 청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면 어김없이 나왔던 답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읽어보라는 대답이었다. 사실 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한번 밖에 읽지 않았다. 그것도 1990년 오늘 같은 가을 오후에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초콜릿 공장의 비밀>은 달콤한 맛에 관한 소설이 아니라 향에 관한 소설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공장에서 흘러나오던 초콜릿향에 대한 묘사와 한 이불을 공유하는 네 명의 노인, 반 기니가 가져다 준 행운이 나에게 남아 있는 전부다. 하지만 초콜릿 한개를 오롯이 먹어보고 싶은 욕구와 처음 맛본 그 달콤한 중독의 유혹을 이보다 더 잘 설명했던 묘사는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복권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에 윌리 윙카의 초대장은 얼마나 커다란 행운이었던가?

하지만 윌리 웡카의 캐릭터는 당시 내 마음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의 시니컬한 성격과 과장된 징벌도 초콜릿의 향에 대한 묘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소설의 맨 마지막장에서 윙카의 시종일관 무뚝뚝하고, 냉혹한 행동과 성격에 일관성이 없어졌던 문장이 돌연 등장했던 것에 의아해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때서야 난 중절모를 쓴 나이든 영국 신사의 이미지에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주인공처럼 조로증에 걸려버린 늙은 청년을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초콜릿으로 만든 강 앞에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막 십대에 접어든 소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문이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내가 읽었던, 혹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과 다른 느낌의 영화였다. 끊임없이 비가 내렸던 지난 여름의 어느날 읽었던 리뷰에 등장했던 중세적 괴담이란 묘사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속을 차지했다. 내가 읽었던 달콤한 유혹이 윌리 윙카라는 캐릭터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팀 버튼의 불우한 상상력 속에서 초콜릿의 특유의 향은 고사하고 있었던 셈이다.

반 기니의 행운이, 가난한 소년의 마음과 초콜릿 공장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이 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초콜릿쟁이인 윌리뿐이다. 소설 전반부의 찰리에 대한 묘사는 착한 아이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만이 아니다. 윌리 윙카의 기행을 마무리 짓는 상대역이자, 잔혹한 중세적 징벌에 대한 괴담을 다소 가볍게 만드는 균형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찰리다. 하지만 스타 시스템과 산업화된 영화 제작은 더 이상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영원한 청년인 조니 뎁과 악동 팀 버튼, 그리고 초콜릿 공장이라는 마케팅 이슈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상업성 속에 문장이 만들어 낸 가장 잔혹하면서도 달콤한 위대한 상상력 하나가 쇠잔해 버렸다.

읽혀지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사실성의 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발화와 침묵 사이에도 비슷한 관계가 성립한다. 문장은 이토록 끔찍한 징벌이 과장된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허구가 실제가 될 때 발생하는 충격을 최소화한다. 그러나 팀 버튼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10월에 개봉할 그의 새로운 영화인 ‘corpse bride’를 보려는 내 심리가 우습기는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는 초콜릿의 또 다른 맛인 쌉살함이 묻어난다.

Closer

월요일 오후. 졸지에 single이 되어버린 J군과 회합을 가졌다. 또 다른 J군의 청탁을 해결하느라 오전을 보낸 나는 세수조차 하지 못한 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의외로 담담한 녀석의 모습에 놀랐다.

불과 이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실연은 꽤나 진중하고 무거운 소재였는데 이제는 보는 사람이나, 당한 사람이나 모두 무덤덤하다. 시간의 횡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감정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삶의 교훈을 체득한 것인지 아니면 만남과 헤어짐의 일상성에 모든 감흥이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천연덕스럽게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 우리는 공부를 할지 영화를 볼지 심각하게 망설이다가 Closer를 빌리러 나갔다.

사실 Closer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Jude Raw와 Natalie Portman, 그리고 Julia Roberts가 나온다는 casting에 대한 사소한 정보 뿐이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처럼 타인의 해석에 오염되지 않는 영화는 꽤나 재미있다. Jude가 연기한 Dan이라는 캐릭터가 사랑이란 허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나, 사랑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Dan의 캐릭터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을 거라는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는 것이나,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인간 심리의 빈틈을 솜씨 있게 짜 맞춘 Larry가 거둔 절반의 성공에 의의를 부여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나, Alice의 절제된 사랑과 Anna의 의미 없는 사랑을 관찰하는 일은 꽤나 다양한 재미를 선사한 듯 싶다.

그러나 사실 지금에 와서는 closer가 혹 원작이 따로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원작이 따로 있다면 영화에서 제대로 들어 나지 않는 인과율과 심리적 뉘앙스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극중에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사실은 거짓일지 모르는 진실과 진실 같은 거짓 뿐이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사이의 불확실성이 이 영화가 지닌 전부는 아니다. 잘빠진 Jude의 맵시와 투박한 Irish style의 Clive가 보여주는 매력이 이 영화의 나머지도 아니다. 지적이지만 그럼에도 약간은 천박해 보이는 캐릭터를 선보인 Julia와 스트리퍼라는 극중 직업에도 불구하고 아둔하기 보다는 단정한 매력을 선보이는 Natalie의 들어나지 않는 긴장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야 말로 이 영화에 숨겨진 진짜 재미다.

[#M_P.S. | less.. | Jude와 Julia가 함께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단정한 하얀 셔츠 속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브라와 낯선 키스, Natalie와 Jude의 침실에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순진한 캐미숄의 대비가 꽤나 인상 깊었다. 지적이지만 약에 취한 코르티잔 같은 Anna의 극중 이름과 좁은 문의 알리사를 연상시키는 Alice의 작명 센스도 일품이었다. Actor보다 Actress의 연기가 더 뛰어났던 영화.

참. single이 되었던 J군은 영화를 보기가 무섭게 다시 couple이 되었다. 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