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영광스러웠던 프랑스 문학의 세기가 지난 지금 프랑스 소설의 현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면 그 책은 바로『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아닐까 싶다. 이 새침한 작가의 성공은 프랑스 문학에 대한 모욕이자 경종이다. 단지 평균보다 조금 더 독특한 캐릭터가 보여주는 비틀기의 미학과 비아냥, 약간의 재미만으로도 소설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성공 이면에는 대가들의 부재라는 현실이 겹친다. 오늘날 살아 있는 프랑스 작가 가운데 대가라는 평판을 얻은 이는 막스 갈로가 유일한데 실제 칼럼에서의 달필과 다르게 소설에서의 그의 필력은 전성기 프랑스 문학이 지니던 강렬한 힘에 견주기에는 손색이 많다. 그런 처지이니 아직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배회하기 바쁜 것이 정상일 이 신예가 enfants terribles라는 평판과 함께 부를 거머쥘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물론 이 소설은 적당히 재밌다. 하지만, 『안나 까레니나』를 읽고 레퀴엠을 듣는 수위라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수위라는 멍한 가면 아래 영리하고 지적인 정신을  감추고 있다고 판단하는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란 어렵다. 언제부터 톨스토이의 소설과 클래식 음악이 교양의 상징이 된 것일까?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좀 어려운 소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리함의 상징이 될 만할까? 레온(Leo. Léon)이란 고양이 이름으로 톨스토이를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트로츠키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른바 훈련받은 지식인이라면 말이다.

솔직히 르네와 무슈 오주의 첫 만남에서 안나 까레니나의 그 유명한 서언이 언급되었을 때 나 역시 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키티와 레빈의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입가에 달콤함을 띈 채 보냈던 그 겨울 방학을 떠올렸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문학이 언제부터 이야기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된 것일까? 나 역시 이런 경향이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책은 좀 메스껍다.

르네가 전형적인 수위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얼굴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팔로마의 몰인정한 관찰자적 성향과 무슈 오주의 지나치게 세련된 관대한 태도 역시 이 소설이 비판하고 있는 그르넬가 7번지의 거주자들의 속물 근성과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쓰이기 위해 쓰인 소설이고, 인물들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기 위해 창조된 캐릭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 살아 있는 진짜 사람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콘만으로 이루어진 소설에 열광하는 바보짓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관념으로 구성된 소설에, 정서적 감동 대신 의도적인 쾌감을 담은 소설에 후한 점수를 주기에는 세상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다. 설령 그것이 한 사회의 위선에 일침을 가한다 하더라고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또 하나의 위선을 그려낸 작가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60만 부가 넘게 팔렸으며 2006년과 올해에 걸쳐 주요 프랑스 문학상을 휩쓸은 이 책에 열광하는 프랑스 문학의 현주소가 조금 안타깝다.

그저 재미로 읽기에 좋은 책. 본질적으로는 로맨스 소설에 약간의 문학적 치장을 곁들인 바보들의 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