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rd Darcy

상투적이라는 묘사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지만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 보면 닮고 싶은 남성像과 조우하게 된다. –물론 콜린 덱스터의 모스 경감은 논외로 하자군대식의 꼿꼿하게 세워진 허리라던 지, 핸섬한 외모, 중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를 능가하는 활력과 기민함. 무엇보다 냉철한 성격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그런 주인공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의 결점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두드러져 보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질투하는 어리석기 그지 없는 행동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귀족 탐정 다아시卿 시리즈로 번역되어 나온 두 권의 책에는 이런 어리석음을 자극하는 페르소나가 담겨 있다. 화려한 문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서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이야기를 재생해 낸다. 추리 소설을 읽으면서 추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게 되는 기현상이 발생할 정도다. 물론 지금껏 쌓아온 세월의 힘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범인을 찍어낼 수는 있으나 (처음 다섯 페이지에 집중하라는 금반언은 아직도 유효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방관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Lord Darcy 시리즈>가 추리 소설의 황금기에 나온 클래식과 비교해 볼 때 구성의 정교함이 떨어지는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정교함 이외에도 부족한 문학적 완성도와 들쑥날쑥한 섬세함 역시 소설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는 읽을 만한 재미가 있다. 단편집인 <세르부르의 저주>의 경우 다소 방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마술사가 너무 많다>의 경우 정말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시리즈의 마지막 단편집인 <나폴리 특급 살인사건>의 경우 단편 사이의 연계성과 점차 스케일이 커지고, 적국인 폴란드와의 갈등 양상이 심화된다는 점에서 다아시 경의 모험이 점차 본궤도에 오르는 느낌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리즈는 작가의 사망으로 여기에서 이갸기가 멈추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참을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부럽다 못해 질투까지 나게 만드는 Lord Darcy도 작가의 추리 기법도 아니다. 바로 익숙하면서도 새롭기만 한 또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과학이 마법으로 대체된 세계이며 실제 역사보다 발전했다면 발전했고 뒤떨어졌다면 뒤쳐진 세계다. 20세기임에도 19세기 초엽과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낯선 세상을 배워가는 재미야말로 다른 추리소설이 주지 못하는 이 소설만의 전매 특허이다. 마치 캐드펠 시리즈가 추리 수준의 열악함에도 불구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뗄 수 없는 것처럼 이 소설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자력이 있다. 그리고 이 자력에 빠져 들어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나면 이 시리즈가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망연한 표정을 짓고 마는 것이다.

P.S.
아마도 오래지 않아 기존의 단편, 중편을 각색한 텔레비젼 시리즈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 시리즈가 지닌 장점을 놓치기에는 이야기꺼리가 사라져 가는 이 세계로서는 너무나 큰 비극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