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누가미 일족

누이들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책을 줄기차게 사들이는 내게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곤 한다. 냉혹하게 평가하자면 오래되어 낡은 추리소설인데다가 내가 일본소설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난 추리소설이 아니라 전후소설을 읽는 기분이란 변명을 늘어놓곤 한다. 세이시의 플롯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전후 일본인에 대한 묘사와 이제는 사라진 일본추리소설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음산함이 매력이라는 첨언과 함께 말이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다른 추리소설에 비해 비교적 플롯이 명백하다. 다른 추리소설에서 하이쿠나 단어의 해석이 중요한 키워드인 것이 비해-물론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 일관성 앞에서는 아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비밀을 푸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물론 살인이 벌어지는 공간의 문제와 거짓 진술의 문제는 이미 『옥문도』에서도 다루어진 부분이기도 하고 모든 추리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문제이긴 하지만 한층 원숙해진 인물 및 배경 묘사가 소설에 차별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누가미 일족』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의 종합판에 가깝다. 지금까지 다른 소설에서 사용되었던 다양한 기법들이 망라되어 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다소 미군정시대의 일본에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성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나온 시기가 70년대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현대성으로 말미암아 『옥문도』에서 보여주었던 것 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사실성은 다소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뭐 60년대와 군정시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혼란이 되려 소설에 특이성을 부여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이누가미 일족『이누가미 일족』에서 세이시는 언어유희나 살인이 벌어지는 제한된 공간의 비밀에서 벗어나 그의 소설에서는 지금까지 발견할 수 없었던 제3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이 제3의 가능성 덕분에 추리소설은 명쾌함에서 더욱 멀어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비록 제3의 가능성이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영미 추리소설에서는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는 범주에 속하고, 일본적인 특수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추리소설이 지닌 매력은 정서적으로 고립된 닫힌 공간이 지니는 폐쇄성과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원한관계의 특수성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이 전후 일본이란 공간과 정신적 코마 상태에 빠진 일본인과 결합되면서 독자를 어둠의 심연으로 이끈다.

해소되지 않은 원한은 한 가족과 한 마을을 파괴하고 기괴한 죽음을 여기저기 흩뿌려놓는다. 하지만, 세이시는 숨겨진 정체를 지닌 가면의 인물들과 목적을 위해 손쉽게 살인이라는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한 군상들 사이에 여러 빛깔의 사랑을 숨겨 놓는다. 게다가 복수의 집념이 남긴 것은 덧없는 죽음의 향연이라는 교훈을 빼놓지 않는다. 그렇기에 두텁게 낀 안개가 사라지고 고립된 공간이 온전하게 외부와 연결되었을 때 독자는 다시 한번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넘치는 평범한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팔묘촌(八つ墓村)

 추리소설에 대한 열정을 문고판 시리즈로 달래던 십대 초반 이후- 정확하게는 그렇게 읽었던 소설마다 뒷이야기를 모두 예측하고 있던 황홀해하던 꿈에서 깨어난 이후. 사실 난 이미 읽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지만 소설의 플롯 자체만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난 추리소설의 범인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몇 개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핵심 용의자가운데 혹은 내러티브를 위한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 가운데 첫 번째 인물이 범인이라는 공식에서 크게 벗어난 경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추리 소설의 모든 단서는 처음 열 페이지에 남겨 있다는 사실만큼 유용한 공식이 또 어디 있을까? 사실 이런 공식의 요체를 인지하고 나면 작가의 농간이 더욱 잘 보인다. 어디쯤 이야기가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한가운데에서도 지도와 나침반을 갖춘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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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묘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추리소설의 공식 아닌 공식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옥문도』를 읽어본 독자라면 1/3시점에서 범인을 알 수 있고, 추리소설의 공식에 충실한 독자라면 인물 소개와 1/10정도의 본문만으로 어렵지 않게 범인을 직관으로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쉬운 추리소설을 쓰는 요코미조 세이시와 무능한 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불만은 잠시 접어두어도 좋다. 트릭과 추리기법 면에서는 졸렬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썩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친구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런 상황을 이렇게도 표현해 볼 수 있다. ‘<텍사스전기톱연쇄살인사건>은 공포영화의 규칙에서 한 치의 예외도 없지만 제시카 비엘의 훤칠한 뒷모습 덕분에 언제 끝나나 하고 자꾸 시계를 보게 되지는 않잖아?’

 긴다이치 코스케가 수사를 통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제삼자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팔묘촌』을 혹평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 비난만큼은 수용할 수가 없다. 만약 그가 전통적인 탐정의 시선을 통한 관찰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범인이 너무나 투명하게 들어나 버려서 추리 소설로서의 맛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외부로 밀려나 은폐되는 범인의 행각이 탐정의 입장에서는 동기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긴다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살인을 통해 전달되는 혹독한 분위기를 보다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관람석이라는 안전한 장소에서 관전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신의 농간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거스를 수 없는 파고 앞에 떨고 있는 한 인간의 옆에 서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사여구로도 감히 『팔묘촌』이 좋은 추리소설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꼭 읽어볼만한 추리소설은 더욱이 아니고, 그저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여행 속에서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의 전투적인 태도를 사근하게 무시하기 위해 이어폰과 함께 가방에서 꺼내는 작은 소품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