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죽음

숫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요즘의 나에게 문학은 환상과 같다. 어느 사이에 문학은 손을 뻗어 붙잡고 싶지만 좀처럼 붙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름다운 문장에 환호하던 난 사라지고, 이제는 마음껏 써지지 않는 토해내면 보잘 것 없는 문장에 좌절하는 나만 남았다. 어린 시절 문학은 나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세상에는 감히 정복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내 지성뿐만 아니라 허영심 또한 자라났다. 하지만, 어두운 도서관의 서가를 정복하는 즐거움이 대제국의 황제가 되는 기쁨과 같다고 믿던 소년의 꿈은 달마다 차고 비기를 반복하는 월급 통장 사이에서 어느새 사치품으로 전락했다.

달콤하고, 편안하고, 즐겁고, 안락하지만 문학이 없는 오늘의 내 일상에 던져진 낯선 소식이 바로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이었다. 내가 처음 그의 소설을 읽었던 그 즈음에도 이미 노령의 그였던 만큼 죽음은 당연한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운 여름을 이기기 위해 차가운 물과 벗하는 동안 블리문다의 아름다운 모습이, 하늘을 날기 위한 투쟁이, 모두가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눈이 멀지 못한 저주를 안은 한 여자의 삶이, 늘 소설 속 어디쯤 자리 잡고 있다가 종국에는 쓸쓸하게 죽어간 한 마리 개가 마음을 스쳐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내려진 결정이 우리를 만들어간다는 노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나 마음에 깊은 파문을 남겼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가 세상에는 쌓여가지만 대가다운 상상력과 필력을 이야기에 담아 삶의 본질을 함께 고뇌하고, 통찰을 제시하던 거장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다. 끝이 없으리라 믿었던 소설의 전성기도 이렇게 대가들의 소멸과 함께 끝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이십대를 풍요롭게 수놓던 그의 작품을 기리며!

 

리스본쟁탈전

소설 읽기를 즐기는 것과 문학적 감수성의 유무는 별개의 문제다.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아도 소설은 누군가의 가장 중요한 취미생활이 될 수 있다. 비록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은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다. 하루 가운데 내가 감정을 사용하는 시간은 고작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 동안 내가 머리를 사용하는 용처는 기억하고, 또 분석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소설 한 권을 빠짐없이 읽고도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들은 『리스본쟁탈전』을 역사 서술의 본령은 무엇인가를 다룬 소설이라 말한다. 무어인의 손에 있던 리스본을 점령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다룬 책에 덧 댄 교정자의 의도적인 손질을 이야기를 초점으로 삼아 무엇이 역사 서술이며, 역사 서술의 공정성과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리스본쟁탈전』은 조금 다르다. 『수도원의 비망록』이 육백 년 역사를 건너뛰어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바와 마리아의 사랑 역시 블리문다의 이야기가 현대적 시점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이 두 가지 사랑이 역사 서술에 관한 문제 제기보다 더욱 끌렸다는 편이 옳으리라.

역사 서술에 관한 논쟁은 이미 2천 4백 년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비되기 시작한 이래로 과학적 역사 서술과 교훈적 역사 서술, 그것도 아니라면 낭만적인 역사 서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물론 현대는 과학적 역사 서술이 모든 것을 압도한 시대가 되었지만, 여기에도 제약은 있다. 미시적관점과 거시적 관점의 대비다. 또 역사 속의 한 인간과 역사성으로 불리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 앞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논의도 있다. 아마 역사에 관한 논쟁으로 또 하나의 역사책을 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이런 논쟁에도 역사는 날마다 축적되고, 해석되기를 기다린다.

주제 사라마구는 인류가 벌여왔던 역사 서술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소설 안에서 또다시 제기하고 있다. 역사의 1차 사료를 기록하는 사람의 불완전성, 여기에 다시 1차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 서술을 쓰는 사람의 불완전성의 문제. 채록된 발화가 발화자의 의도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가? 역사의 설명할 수 없는 틈새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상상력인가? 아니면 틈새를 빈틈으로 남겨 놓아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대체적인 사실인가 아니면 세부적인 사실인가? 사건이 후대 역사에 미친 영향력과 사건이 당대 사람들의 마음에 미친 영향력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결과론적 논의와 과정을 중시하는 논의가운데 어느 것이 본령이 되어야 하는가? 사라마구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있을 법한 또 다른 역사를 자유롭게 오가며 대가다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대가다운 상상력 덕분에 피곤한 것은 독자다. 그렇지 않아도 호흡을 따라가기 어려운 그의 단문 앞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 지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을 재미나게 읽는 방법은 두 가지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다. 평생을 홀로 가끔 돈으로 사는 침대나 드나들며 중년을 넘겼을 한 사내가 우연히 마음 설레는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이 새롭게 쓰인 리스본 쟁탈전을 통해 조금이나마 오래가기를 바라는 것. 이 정도가 결코 역사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은 독자로서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싶다.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의 『도플갱어』는 노대가의 범작이라는 평판이 딱 어울릴만한 소설이다. 짜릿함을 자극하는 극적인 맛과 섬세한 구성은 아니지만 무난함 가운데에서 이야기는 손쉽게 풀려나간다. 백점 만점에 83점 정도의 소설. 두고두고 회자될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의 재미란 것에 중독된 독자에게는 아껴두고 먹고 싶은 간식 정도랄까? 하지만 이런 평판도 다 사마라구라는 노대가의 소설이기에 조금은 평가절하된 것이다. 아마 다른 이가 이 소설의 작가라면 조금 더 후한 평가를 얻었을 이 소설을 박대하는 이유는 그가 사라마구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실 『도플갱어』의 도입부는 조금 지루하다. 도입부의 전개는 중반부터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전개에 비하자면 하품 나올 정도로 느리고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왜 이렇게 더딘가 싶을 정도로 별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도플갱어의 설정은 영화 속에서도 보았고 다른 삼류 소설 속에서도 읽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반응은 뭐랄까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같다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도플갱어에 대한 느릿한 추적과 그 속에서 겪는 주인공의 불안감. 역사교사로서 평범하기만 했던 주인공의 삶에 나타난 놀라운 발견이 일으키는 파문은 정말 느릿한 어조 속에 차분하게 진행된다. 물론 여기까지 읽었을 무렵 난 뒷이야기를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지루한 파문 속에 예민했던 내 신경은 바스러져 버렸고 그 당시 내가 원했던 것은 이 만성적인 과민 신경의 상태에서 주인공이 벗어나는 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말을 놓고 생각해 보면 놀라운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상상하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봤을 완벽한 바꿔치기의 삶을 어째서 난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만약 내가 누군가의 도플갱어라면 상대의 삶 속에 침입해서 그의 아내를, 그의 연인을 아무도 모르게 한번쯤 농락해보게 될 것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왜 내 머릿속에 울려 펴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상대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복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내가 착하고 바른 사람이라서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고약한 거짓말일 테지만 수없이 튀어나오는 강력한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외면한 내면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어찌되었건 『도플갱어』가 흥미로운 이유는 이 소설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대한 소설이고, 운명에 관한 소설이며 나약함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도플갱어라는 장치는 그저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한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혼란 속에서 주인공은 극적이지는 않지만 평범한 ‘진짜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인간의 나약함과 운명의 변덕 앞에서 부셔지게 되며 주인공은 또 다른 Gyges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 새로울 것이 없는 이야기지만 칸달루스왕의 아내이자 주인공이 살아야만 하는 새로운 운명의 아내는 전작에서 의사의 그려진 의사의 아내의 분신이다. 그리고 소설의 맨 마지막장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은 운명의 희롱에 맞서 싸울 각오를 다지게 된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이 소설에서 역사교사인 주인공을 제외하면 나머지 캐릭터는 고정된 주인공에 종속된 캐릭터라는 점이다. 중요한 인물은 희한한 이름을 지닌 주인공 한 사람뿐이며 이 남자의 심리와 상태 변화가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할 부분이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반복된다. 도플갱어라는 삼류 소설에나 등장할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플라톤의 Gyges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두 도플갱어에게 마지막으로 정체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맡는 소설적 장치가 반지라는 사실은 이런 느낌에 보다 강한 확신을 준다. 사라마구판 Gyges랄까?

눈뜬 자들의 도시

역자 후기와 조우할 수 밖에 없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조차 나는 엄두가 나지 않는 그리하여 누구도 답을 알려줄 수 없는 수수께기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수수께끼의 답이 정말 난해했던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이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흠잡데 없이 노련했던 대가가 자신의 작품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걸까? 그의 선고가 단지 추인에 불과한 것이라면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애초에 사형선고가 아니었던 것인가? 이것마저도 대가가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기법에 불과한 것인가? 그의 절망감과 위화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모든 냉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망적일 수 있었던 그의 시선이 왜 희망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노대가가 발견한 삶의 진실이 결국은 눈을 감은 것이나 뜬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라는 선문답인 것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좋은 독자가 되는 요령은 의외로 쉽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한 방향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쉬운 일이 요령부득한 일이 되기도 한다. 너무 어렵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에 지침은 엉뚱한 권장 사항이 되어 버린다. 문장을 읽지만 행간에는 한 발자국도 접근할 수가 없다. 도대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어찌해야 하나? 망망대해에서 삭구를 잃은 범선처럼 책갈피 사이를 표류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노대가의 인터뷰를 추적해서 그의 진짜 의도를 파악해 본다든지 아니면 반복적으로 문장을 음미해 본다든지 하는 정도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들이다. 하지만 이런 대안들마저 녹록하고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방금 전에야 깨달았다. 대가의 실수쯤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덮어 놓고 좋은 소설이라고 우겨댈 수 있는 무모한 용기가 나에게도 있었다면 하루를 얼마나 쉽게 살아갈 수 있을까?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나는 이야기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정치적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의 내 일부분은 현실을 살아가는 다른 부분보다 결코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정치적 함의에는 눈을 감은 채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제로 밑그림을 그리며 소설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눈뜬 자들의 도시』는 상황이 다르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는 이상 그가 말하려는 의도를 넌지시 무시할 수 없다. 그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집요하며 그의 절망은 깊고도 무겁다.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우아한 세련미를 포기했다. 세련미를 포기하는 대신 그는 독자들을 종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로 몰아갔다. 그가 야기한 혼란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며 혹여 답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킬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