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기가 찬 노릇이지만 지금까지도 난 가끔 이른바 ‘통속 소설’이라는 장르의 책들을 읽는 내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런 부끄러움에도 ‘통속 소설’의 중독성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조잡한 인물과 구성, 문체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꾸역꾸역 읽어대고 있는 나를 발견할 찰나면 스스로에 대한 참지 못할 혐오감으로 뺨이라도 한 대 올려치고 싶은 것이다.

 언제인가 작고 어여뻤던 친구에게 이런 내 혐오감을 토로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이런 내 상황을 이렇게 풀이했다. “그러니까 빅맥을 먹는 기분이란 말이지. 몸속에 이상한 이물질을 차곡차곡 쌓는 기분. 아 몸이 아니라 정신이 되겠구나.” 다른 친구 하나는 내 느끼는 그 부끄러움을 이렇게 정의했다. “네 아이팟에 담겨 있는 브리티니의 앨범 같은 거구나. 글렌 굴드와 스탄 게츠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얼룩을 들킬까 하는 마음!”  

 하지만 나에게도 모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있다. 열 살 꼬맹이 앞에서 통속 소설을 읽는 특권을 한껏 자랑하던 누이들 말이다. 그들이 나를 감질나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내 삶에 통속 소설이란 단어는 영원히 입장을 금지 당했을 지도 모른다. 물론 희망 사항이기는 하지만.

 토마스 해리스의 『한니발 라이징』에 대한 서두가 이렇게 치졸한 것이 되어버린 이유는 그의 소설들이 앞에서 언급한 내 삶을 이렇게 치졸하게 만든 원흉이기 때문이다. 『양들의 침묵』을 읽은 둘째 누이가 조금 뜸을 덜 들였다면 수능을 열흘 남겨놓고 『한니발』을 읽던 만행 역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햇살이 따스한 주말 아침에 욕지기를 참으며 『한니발 라이징』을 읽을 까닭조차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한니발 렉터의 연대기의 끝으로(제발 이것이 끝이었으면 좋겠다) 『한니발 라이징』은 최악의 결말이다. 오랫동안 행간을 통해 짐작하던 한니발 렉터의 프로파일을 삼류 만화로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골든베르그 변주곡을 피치궁에서 연주하던 한니발 대신에 하이쿠를 읊고 투정과 응석으로 물든 한니발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super nanny’에 등장하는 꼬마 무뢰배들을 열일곱쯤으로 그대로 성장시킨 기분이다. 소설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요역하자면 한니발이 지닌 우아한 냉혹 혹은 잔혹함을 ‘킬빌’풍으로 풀어 놓았다는 문장 이외의 것을 생각할 수 없다. 한니발의 덜 성숙한 모습은 그것 나름대로 신선했지만 사건 전개와 플롯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헐거웠다.

 만약 한니발 렉터가 누군지 모른다면, 이 책을 읽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권한다. 애초에 그의 연대기는 시작될 필요가 없었다. 만약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 연대기의 졸렬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바란다. 이제야 우리는 아무런 아쉬움 없이 한니발이란 미지의 캐릭터에서 졸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