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란도트 (Turandot)

Puccini
<영 인디아나 존스 the Young Indiana Jones chronocles>의 미방영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인디의 어머니가 피렌체에서 푸치니와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토스카 Tosca>와 <라보엠 La Bohéme>, <나비 부인 Madama Butterfly>과 <투란도트 Turandot>의 작곡가인 푸치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적 창조력은 이미 1910년을 경계로 내리막길로 접어든 것으로 본다. 에피소드에서는 그런 푸치니의 창조력 결핍을 인디의 모친과의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 탓으로 돌리는 대범함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무엇이 그의 음악적 영감의 불꽃을 사그라지게 하였는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말년의 평범함을 뛰어넘는 지극히 천재적이고, 영광스러웠던 젊은 시절의 그가 우리가 알고 있고, 또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고 듣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Turandot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투란도트>와의 첫 만남은 1990년 로마 월드컵에서 카라칼라 욕장을 배경으로 당대의 세 테너가 주빈 메타와 함께 공연했던 모습이다. 파파로티가 부르던 Nessen Dorma를 듣는 동안 마음속을 채웠던 감동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처음으로 오페라가 지닌 매력을 맛보았던 그 순간을 잊게 된다면 내 삶은 얼마나 황량하고 공허한 것이 될까? 극 중에서 칼리프가 부르는 ‘내일 새벽까지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난 공주를 얻게 되리라’고 노래부르던 그 목소리에 담긴 자신만만함과 충만한 에너지가 나를 어떻게 매혹시켰는지를 표현하는 일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하지만, 오늘날 <투란도트>에 대한 내 느낌은 열 살 소년이 느꼈던 감동과는 또 다르다. 이것은 비단 <토스카>나 <라 보엠>에서 보여주었던 활기차고도 기민하던 푸치니의 스타일과 <투란도트> 사이에 놓인 간격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푸치니의 사후 <투란도트>를 완성한 프랑코 알파노의 잘못도 아니다. 기실 3막의 1장 중반을 경계로 느껴지는 이질감이, 리우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일관성을 잃고 흘러가기 시작한 음표의 기다란 행렬이 사실 푸치니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미완성작이 되어버린 오페라의 숙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문제는 바로 나의 편벽하고 고약한 습성 탓이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들을 때마다, 어느 까페에 앉아 무료한 표정을 짓는 동안 실내에 Nessen Dorma가 울려 퍼질 때마다, 만약 『제인 에어 납치사건』에서처럼 시간을 여행할 수 있게 된다면 푸치니에게 항암제를 먹이고 <미저리>의 케시 베이츠처럼 푸치니 곁에 앉아 <투란도트>를 완성하게 만들고야 말 거라고 다짐하는 내가 바로 문제의 진앙이다. 기이한 열정에 이끌려 1926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좌에서 토스카니니가 3막 1장에서 지휘봉을 내려 놓으며 ‘오페라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에스트로는 숨을 거두었습니다.’라고 관객에서 고하는 장면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망상에 잠기는 일을 <투란도트>의 피날레보다 더 좋아하는 굼뜨고 하릴없는 내가 문제다.

Turandot in Sejong Centre directed by Pizzi
자금성에서의 말 많았던 공연 이후 <투란도트>는 만다린 풍의 무대와 의상이 표준으로 자리 잡은 듯싶다. 하지만, 이런 표준화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었던 <투란도트>를 즐길 기회를 박탈당했다. 만다린이 중국 문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색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항상 만다린 풍<투란도트>만 봐야 한다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오페라가 지니는 특성에 동양적인 색채를 가미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이제는 중국적인 빨간 색조에 오페라라는 껍집을 뒤집어 씌운 듯 어색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피치 공연은 DVD로 접한 테아트로 레알 마드리드의 색채가 흐릿하다. 피치의 전매특허나 다름없는 토플리스 무용수들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올해에는 지난해의 공연에 비해 무대 디자인이 암담할 정도로 단조로와 졌기 때문이다. 3막 동안 바뀌지 않는 오페라 무대는 그것이 지닌 광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평면에 그려진 우울한 천조각과 다를 바가 없다. 양 대전 사이에 유행하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거장들의 무대를 재현해 달라는 것은 무리겠지만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닐까?

칼리프 역을 맡은 테너의 작은 성량, 단조로운 음색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줄 수도 있다. 자부심과 충만한 에너지를 느낄 수 없는 Nussen Dorma도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참아주고 나면 이 공연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말은 핑, 팡, 퐁이 모두 바리톤인 줄 착각했다는 말이나(사실 핑만 바리톤이고, 팡과 퐁은 테너야만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셋의 릴리프가 극에서 제일 나은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다,) 티무르가 눈이 먼 상태라기보다는 그저 늙고 병든 힘없는 노인으로 보였다는 것밖에 없다. 또, 핑, 팡, 퐁이 모두 대신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내 좌석에서는 셋을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던 가를 설명하는 지난한 작업 외에는 이 공연에 대하여 더 쓸 말이 남지 않게 되어버린다. (실제로 핑은 재상, 팡은 시종장, 퐁은 요리사다.)

[#M_P.S.|less..|
얄팍한 지갑 덕에 벽에 붙어서 봐야만 했던 공연. 하지만, 돌이켜 보면 공연의 수준에 딱 맞는 지출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너그러워지려고 해도 난 편익/비용의 노예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젊은 처자처럼 차려입은 십 대 소녀들이 인터미션에 취하는 몸짓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라파엘 전파에서 빈 분리파까지 그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의 모델을 찾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에곤 실레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순간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전율 그 자체다. 짧은 치마를 맵시 나게 차려입었지만 그 어린 몸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우아함은 제한 시간 10분짜리 한정 쿠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공연. 그리고 수수께끼를 푸는 데 너무 쉽게 풀어서 도무지 재미가 없다는 그네들의 감상은 극적 긴장감이 거의 없었더라는 표현으로 치환해도 될 듯하다. 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