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매혈기

험난한 시대에 냉혹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곧은 신념을 갖는 것이 올바른 일이기는 하지만 곧은 신념이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것은 돌연변이 혹은 아웃사이더란 꼬리표뿐이다. ‘무엇이 옳은 것이냐’보다 ‘무엇이 좋은 것이냐’가 화두가 된 이 시대에 삶은 소리 없는 전장이 되었고, 논쟁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아주 가끔 사람 좋게 웃어 보는 정도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허삼관매혈기』에 들어가기 앞서 구구절절이 나 스스로가 악당임을 밝히는 이유는 내가 허삼관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더 나은 훈련을 받았음에도 남편으로서의 그의 마음을 아비로서의 그의 마음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지만 단언하건데 노인이 되어서도 난 그의 마음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나 자신뿐이란 마음이 나이를 먹어도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악당 흉내를 내며 용렬함을 감추는 것이 전부이다. 이 정도의 용기 밖에 갖지 못한 나로서는 한 평생을 살아도 그가 보여준 행동을 머리로 이해는 해도 몸으로 보여줄 수 없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오랜 시간동안 이 소설을 읽기를 망설였던 이유는 이런 스스로의 비겁함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한편으로는 공지영과 이문구의 추천사가 눈에 거슬렸다- 나에게는 할 일이 많고, 결코 허삼관의 마음 같은 것은 알 필요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야만 한다고 세뇌를 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장의 끝에 이르렀음에도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다. 이런 저런 비평으로 본질을 희석시킬 의도도 없다. 너무나 특별한 시기의 중국이라는 배경과 강한 콘트라스트의 사진을 보는 듯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의미하는 핵심이 배경을 뛰어 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 남겨진 것은 난 너무 늦었으니 훗날 딸자식이라도 하나 갖게 되면 허삼관 같은 사위를 데려오기를 비는 정도다. 게다가 그런 사위라면 아주 가끔 남몰래 황주 한 잔을 같이 기울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