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ington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지만 워털루 전투를 알기 전부터 웰링턴을 알았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다가 웰링턴이라는 이름의 근면하고 성실한 고아 소년과 조우한 적이 있고 그 책의 다른 이야기에서는 웰링턴 시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 언급되기도 했다. 세계지도를 보다가 뉴질랜드의 항구인 웰링턴 항을 찾았던 적도 있다. 아! 웰링턴 부츠를 알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19세기 이후의 영국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 마다 한번은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웰링턴 부츠이기 때문이다 –현대 소설에서는 고무 장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이 유명한 장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버나드 몽고메리의 『전쟁의 역사』를 통해서였다. 워털루 전투보다 이베리아 전역을 더욱 심도 있게 다루었던 몽고메리는 아서 웨즐리가 보여주었던 소규모 군대에 의한 기동종심타격 전술을 식민지 전쟁의 완성판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서 웨즐리, 후대에 웰링턴 공작이자 토리당 총리였으며 ‘iron duke’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수잔 클라크의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이었다.

클라크는 이 소설에서 이베리아 전역에 종군한 마법사인 스트레인지가 웰링턴과 함께 헤쳐온 전장을 탁월한 솜씨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워털루 전투에 이를 즈음에는 숭고하다 싶을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즈음에 BBC가 제작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리스본을 방어하기 위해 세웠던 삼각 토루에 서서 웰링턴의 행적을 추적하는 리차드 홈즈를 보자마자 머리 속에서 이 남자가 쓴 웰링턴의 전기가 있다는 정보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존 키건과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전쟁 사가인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에서 이미 반쯤 점수를 먹고 들어난 이 책은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Wellington』은 웨즐리라는 인물의 출생에서부터 인도의 절반을 점령한 세포이 장군으로서의 위상과 이를 통해 얻게 된 가문의 정치적 입지 상승. 하지만 유럽 전역에서 지상군이 일소된 한계로 말미암아 군대 없는 장군으로써 정치가들의 입맛에 따라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시기. 이베리아 전역에서의 화려한 역전과 워털루에서의 패배에 가까운 승리. 마지막으로는 산업 혁명의 여명기에 군인에서 정치가로 떠밀어진 한 인물이 겪게 되는 시련을 짜임새 있게 전개하고 있다.

자료 조사와 인용의 충실할 뿐만 아니라 리차드 홈즈는 웨즐리라는 인물을 통해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장교들의 삶과 정치와 군사력의 역학 관계. 시스템 내부에 만연한 부패와 정치가들에 의한 소모성 원정 등의 제한된 구조화에 그친 당시 군대 자체가 봉착한 한계를 성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앤드류 램버트의 『넬슨』이 식민지 전쟁에서 갈고 닦여져 완성된 해군이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어떻게 전략적 승리를 도출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Wellington』은 식민지 전쟁 시대의 후진적 군사 시스템을 보유한 육군이 나폴레옹 전쟁의 호된 시련을 통해 훗날 레드코트로 불릴 제국주의 영국의 강제한 강제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그 단초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사실 리차드 홈즈는 저작도 여러 권이고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로도 명성이 높지만 키건과 다르게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된 저작이 없다. –공저로 번역된 『나폴레옹의 영광』작년에 출간되는 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이 책이 번역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하지만 미래는 모르는 법이고 헐리우드와 웨스트엔드의 합작으로 웰링턴을 주인공으로 한 대형 사극이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한다면 프레이저의 마리 앙뚜아네트처럼 서가에 진열될 날이 오지 않을까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