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이야기 & 항해의 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반 룬의 『배 이야기』를 만난 것은 좀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서해문집의 출간 예정을 본 이래 일 년 가까이를 이제나 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발간을 기다렸는데 전혀 낯선 출판사에서 의외의 장르로 간행 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몇 장을 넘겼을 때 기대만큼 대단한 책은 아니라는 실망이 앞섰다. 아이들이나 좋아할 그 삽화와 커다란 글씨가 집중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실망감은 고단함 속에서 중반을 넘겼을 때 극적으로 반전될 수 밖에 없었다. 반 룬의 명성을 섣부르게 의심한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만큼 흥미진진한 진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다를 바라보는 양 대전 사이의 관점이 그대로 투영된 문장은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반 룬의 『배 이야기』출간 된지 80여 년 지난 흐른 지금에 와서는 그의 예견이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행간 여기저기에 숨겨진 해양전(海洋戰)의 교리를 발견하는 재미는 쏠쏠함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반 룬의 『배 이야기』에는 바다와 관련된 책이라면 의당 다룰 만한 인물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바다라는 공간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배라는 객체 자체와 배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서술 양태는 확실히 조금 낯설다. 하지만 낯설음에 대한 적응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색다른 책이 지니고 있는 장점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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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룬의 『배 이야기』가 배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면 『항해의 역사』는 미지에 대한 탐험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까닭에 『항해의 역사』는 『배 이야기』에 스케일이 넓고 보다 근본적인 사회/정치/경제적 힘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용기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그리고 대양 항해야말로 이 책의 기저에 깔린 진짜 화두다.

사실 『항해의 역사』가 바다와 탐험 항해를 다룬 그저 그런 책이 되는 대신 무언가 색다른 목적을 지닌 책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정함에 있다. 오랜 해양 문명의 적자로 태어난 작가들에게 보이는 건방짐에 가까운 생략과 과시 대신 『항해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를 강조한다. 안타까운 희생과 불굴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시간의 흐름 속에 부침을 거듭하는 탐험 자체의 매력. 이런 것들이 『항해의 역사』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어쩌면 해양 장르로 불리는 이런 종류의 책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전술한 특징들은 못내 지겨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다른 책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장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고대 항해의 대하여 높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중해에서 북대서양을 향하여, 홍해에서 지브롤터를 향해 배를 띄웠던 무모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인문학자도 엄두내지 못할 만큼의 높은 사실성을 토대로 서술된다. 고대 세계에서조차도 하나의 전설에 불과했던 문헌 정보들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집적한 탐험/ 항해 정보와 결합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진실로 증명되는 과정이 재밌지 않다면 무엇이 재미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