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쟁탈전

소설 읽기를 즐기는 것과 문학적 감수성의 유무는 별개의 문제다.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아도 소설은 누군가의 가장 중요한 취미생활이 될 수 있다. 비록 행간을 읽어내는 능력은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애석하게도 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다. 하루 가운데 내가 감정을 사용하는 시간은 고작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시간 동안 내가 머리를 사용하는 용처는 기억하고, 또 분석하는 작업이다. 그러니 소설 한 권을 빠짐없이 읽고도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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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리스본쟁탈전』을 역사 서술의 본령은 무엇인가를 다룬 소설이라 말한다. 무어인의 손에 있던 리스본을 점령함으로써 포르투갈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다룬 책에 덧 댄 교정자의 의도적인 손질을 이야기를 초점으로 삼아 무엇이 역사 서술이며, 역사 서술의 공정성과 자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읽은 『리스본쟁탈전』은 조금 다르다. 『수도원의 비망록』이 육백 년 역사를 건너뛰어 다시 재현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바와 마리아의 사랑 역시 블리문다의 이야기가 현대적 시점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이 두 가지 사랑이 역사 서술에 관한 문제 제기보다 더욱 끌렸다는 편이 옳으리라.

역사 서술에 관한 논쟁은 이미 2천 4백 년에 걸쳐 이루어져 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대비되기 시작한 이래로 과학적 역사 서술과 교훈적 역사 서술, 그것도 아니라면 낭만적인 역사 서술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물론 현대는 과학적 역사 서술이 모든 것을 압도한 시대가 되었지만, 여기에도 제약은 있다. 미시적관점과 거시적 관점의 대비다. 또 역사 속의 한 인간과 역사성으로 불리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 앞에서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논의도 있다. 아마 역사에 관한 논쟁으로 또 하나의 역사책을 쓰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이런 논쟁에도 역사는 날마다 축적되고, 해석되기를 기다린다.

주제 사라마구는 인류가 벌여왔던 역사 서술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을 소설 안에서 또다시 제기하고 있다. 역사의 1차 사료를 기록하는 사람의 불완전성, 여기에 다시 1차 사료를 해석하여 역사 서술을 쓰는 사람의 불완전성의 문제. 채록된 발화가 발화자의 의도를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가? 역사의 설명할 수 없는 틈새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상상력인가? 아니면 틈새를 빈틈으로 남겨 놓아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대체적인 사실인가 아니면 세부적인 사실인가? 사건이 후대 역사에 미친 영향력과 사건이 당대 사람들의 마음에 미친 영향력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결과론적 논의와 과정을 중시하는 논의가운데 어느 것이 본령이 되어야 하는가? 사라마구는 과거와 현재, 역사와 있을 법한 또 다른 역사를 자유롭게 오가며 대가다운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대가다운 상상력 덕분에 피곤한 것은 독자다. 그렇지 않아도 호흡을 따라가기 어려운 그의 단문 앞에서 어디쯤에 서 있는 지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이 소설을 재미나게 읽는 방법은 두 가지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다. 평생을 홀로 가끔 돈으로 사는 침대나 드나들며 중년을 넘겼을 한 사내가 우연히 마음 설레는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이 새롭게 쓰인 리스본 쟁탈전을 통해 조금이나마 오래가기를 바라는 것. 이 정도가 결코 역사 전문가가 되고 싶지 않은 독자로서는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