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치아노 미스터리

이언 피어스의 소설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핑거포스트1663』에서 보여주었던 재기를 다시 한 번 보여줄 것이란 희망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핑거포스트1663』가 예외적인 소설이라는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새롭게 번역되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실망감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이 소설들이 그의 초기작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해외 독자는 원서의 출간일보다 역서의 출간일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습성을 버릴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일명 미술사 미스터리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낱권으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라쇼몽>에 비견될 만한 재치를 보여주었던 『핑거포스트1663』에 다가서기에는 아직 너무 먼 거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의 첫 이야기인 『라파엘로의 유혹』에 난 그토록 강한 비판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는 생생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읽고 있노라면 수만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사건이 벌어진 공간을 엿보는 듯한 약간의 현장감이 있다. 시리즈의 첫 권을 읽은 독자에게는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었다는 점 또한 되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다가와 연기를 펼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스케일이 큰 미니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널리 알려진 티치아노는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화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나체의 마야>나 <뒤로 돌아 거울을 보는 아프로디테>, <올랭피아> 같은 여성의 와상 누드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며, 그가 손끝으로 거칠게 표현한 짙은 바다가 인상적인 <비너스의 탄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앵그르의 누드 초상화와 사세리오의 아름다운 여인들 역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티치아노 미스터리』는 바로 이런 티치아노 연구를 위해 설립된 위원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이면에 깔린 진짜 이야기는 미술계와 인간의 추잡한 욕망에 관한 소고다.

2006년 여행에서 내가 본 물에 잠긴 베네치아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간이다. 찬란한 햇살이나, 바닷바람을 맞으며 플로리안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물에 잠긴 바다의 도시를 걸으며 느낀 아름다움을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차마 이 소설에 악평을 남길 수가 없다.

스키피오의 꿈

짐의 부피를 줄이기 위해 이곳에 챙겨온 유일한 책은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 한 권 뿐이다. 사실 이마저도 챙겨오지 않으려 했으나 지루한 비행을 생각해서 한 권 챙겨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챙긴 책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토록 긴 비행동안 난 단 한 줄도 문장을 읽을 수 없었다. 난기류에 휘말려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을 느끼다 보니 문장을 읽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은 ‘핑거포스트’를 통해 그의 팬이 되었던 독자층을 반분 할 것 같다. 일부는 ‘스키피오의 꿈’에 실망을 느낄 것이 분명하고 일부는 과거보다 더 깊게 그에게 빠져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쪽에 속할까? 사실 아직 방향을 정하지 못한 것 같다. ‘스키피오의 꿈’은 매력적인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핑거포스트’에서 보여주었던 기교에 비해 엉성해진 플롯이 신경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마저도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왜 ‘스키피오의 꿈’을 읽으면서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디에서인가 이미 읽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왜 떠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묘하게 비슷한 플롯의 소설들이 머리 속을 떠다닌다. ‘이 문장은 이렇게 실현되꺼야’ 하고 예상하기도 전에 이미 다른 소설들을 통해 익숙한 장면들이 머리 속을 배회한다. 한국에서라면 널찍한 서가의 도움으로 확인할 수 있을 수많은 사실들이 이곳에서는 미지의 영역이다. 지금 나는 그가 무의식중에 그가 읽은 소설들의 이야기들을 결합시켰다는 데에 30%정도의 가능성을 두고 있는데 이마저도 현재의 내 상태에 기인한 착각일 가능성을 고려하면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어쨌든 이안 피어스의 ‘스키피오의 꿈’은 꽤나 몽환적인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우리에게 ‘스키피오의 꿈’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재미는 바로 인물들이 그들이 지닌 변화의 가능성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현대 소설의 전형과는 좀 다르다. 태초에 그들의 행동과 그것이 미칠 영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런 제약 아래에서도 현대 소설이 지니는 전형적인 갈등 관계가 지속된다. 비록 다소 나른한 분위기로 갈등이 진행되더라도 말이다. 아니 되려 이런 고정성이 한층 강력한 아이러니를 제공한다. 너무 강력한 아이러니라서 반론을 제기할 힘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두 손을 놓은 채 분위기에 휩쓸려 갈 정도로 묘한 분위기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른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는 비극이 되려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어디에서인가 읽은 결말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라파엘로의 유혹

<라파엘로의 유혹>은 근래 들어 내가 만난 가장 얇은 소설가운데 하나다. 물론 내용이 얕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께가 매우 얇다는 의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안 피어스의 명성이나 이탈리안 마스터즈 미스터리의 첫번째 이야기라는 화려한 수사에 비해 다소 조악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라파엘로의 유혹>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며, 인물 역시 평면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재미없는 소설로 정의 내리기도 어렵다. 장면의 전환 때마다 잠시 숨을 돌리는 정도의 틈을 제외한다면 정말 단숨에 있을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안 피어스의 글은 지인의 평가대로라면 소설가가 아닌 먹물이 쓴 소설의 표본이다. 그의 소설은 독자의 상상력 대신 지식과 정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의 소설을 읽는데 상상력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백과사전처럼 머리 속에 정리되어 있는 정보를 쉽게 꺼내보는 재주가 필요하다. 오래 전부터 알아온 정보를 토대로 그가 말하고 하는 바와 배경을 그려내는 것. 이 재주야 말로 단조로운 그의 소설을 재미나게 즐기는 요령이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꾼이 아닌 천부적인 재능 없이도 누구나 쓸 수 있는 리포터의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런 까닭으로 그의 소설은 문체에 집중할 필요조차 없다. 그의 소설에서 읽어야 할 것은 인물의 내면 심리가 아니라 그저 진행 중인 사건 하나 뿐이다. 진행 중인 사건에 백과사전에서 찾아낸 정보를 토대로 살을 입히며 머리 속으로 나름대로의 영화 한편을 제작하는 것. 이 정도가 그의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다.

비록 이안 피어스가 외부적 갈등을 테마로 변주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그린 세상은 월트 디즈니조차 경의를 표할 만큼 갈등 없는 천진난만한 세계다. 이 정도면 그가 소설가로서 빈곤한 재능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명백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핑거포스트 1663>을 읽는 중이고, <티치아노 위원회>나 <스키피오의 꿈>을 살 예정이다. 소설가로서의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평면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여백을 마음껏 장식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은 나의 소설로 탈바꿈 된다. 시폰 케이크을 사서 생크림을 직접 바르고, 그 위에 데코레이션을 올리는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M_P.S.|less..| <라파엘로의 유혹>을 읽기 전에 데코레이션 기법을 익히기 위한 책으로는 장 자크 피슈테르의 <태양의 가면>과 마이클 프레인의 <곤두박질>을 권한다. 이 2권의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 <라파엘로의 유혹>을 읽는다면 어째서 언론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그를 폄하하는지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작의 모티브와, 명작의 손실 혹은 손괴가 이루어지는 모티브는 위의 두 권과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주인공 대학원생의 이미지와 이탈리아 수사관의 이미지는 바이어트의 <소유>의 분위기와 유사하며. 살인 사건은 빈텐부르크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미술품 담당 기동대의 책임자에 대한 묘사는 엘러리 퀸의 추리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름 난 신문의 서평 전문 기자들의 사랑을 받는 그에게 던지는 이런 비아냥은 온전하게 질투로 보이는 법인 것을…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