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

장 폴 뒤부아의 『타네씨 농담도 잘하세요』를 읽게 된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다. 까닭 없이 매우 신맛이 그리운 때가 불쑥 찾아오는 것처럼 복잡한 그래프와 수학 후기틈에서 여러 주를 보내다 보니 갑작스레 유쾌한 프랑스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선량하게 유쾌한 소설보다는 위트 수준의 블랙 유머와 섹슈얼리티가 함께 담긴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사실 개인적인 용례를 따르자면 난 이런 상태를 ‘Unfaithful’라는 코드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오래 전 개봉한 한편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며 통속소설을 읽고 싶은 내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이 영화는 90년대 백마 탄 왕자님의 전형이었던 리차드 기어가 오쟁이진 남편으로 등장하는 아이러니가 마음에 들었고 수많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다이안 레인이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으며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의 몸이 지닌 아름다운만큼은 제대로 화면에 담아낼 줄 아는 노련한 아드리안 라인의 솜씨가 구색을 맞춘 쓸만한 영화였다. 게다가 절친한 친구인 K가 민망할 정도로 큰소리로 같이 보러가자고 하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 거렸던 기억이 남아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용례야 어찌되었건 『타네씨 농담도 잘하세요』라는 제목을 본 나는 뚜렷한 근거 없이 쥐스킨트의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와 비슷한 소설일거라고 추측했다. 『프랑스적인 삶』에서  뒤부아가 묘사한 암실에서 벌인 아내의 남자 친구되는 사람의 부인과의 외도같은 허망한 결론의 이야기가 머리 속을 스쳐갔다. 당시의 기분에 딱 맞는 내가 원하던 이야기였음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내 추측이 진실과는 백만광년은 더 멀리 떨어진 잔인한 추측에 불과했음이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이 소설은 로시니風이 아니라 오히려 『비둘기』에 가깝다. 『비둘기』의 주인공이 비둘기의 존재에 휘둘린 것처럼 타네씨는 주택건설공들이라는 비둘기보다 한층 가혹한 존재들에게 농락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이 가진 느낌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은 이 정도가 전부다. 얇고 선량하게 유쾌하지만 그렇다고 걸작은 아니며 ‘unfaithful’한 소설을 기대하기에 타네씨는 너무 점잖하며 여린 존재다. 서점에서 여자 친구를 기다리며 나도 프랑스 소설을 읽는다는 과시용으로 삼기 딱 좋은 소설이 아닐까 싶다.

P.S.
Vous Plaisantez, Monsieur Tanner!』라는 원제에서 『타네씨 농담하지 마세요』란 제목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과 달리 새로 찾아온 책의 제목은 위와 같다. 하지만 난 주구장창 『타네씨 농담도 잘하세요』라고 기억할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적인 삶

본가의 넓은 거실에서 개인적인 연휴를 보내고 상경하는 길이었다. 뜻하지 않게 지하철에서 나와 똑같은 눈높이를 지닌 한 남자와 눈이 얽혔는데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는 눈초리로 훑고 있었다. 논증 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그 남자는 내 모습에서 그 자신의 과거를 발견한 듯싶었고 난 그 남자의 모습에서 6년쯤 뒤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우연찮게도 그는 Aria da Capo를 듣고 있었고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눈치챘을 때 나 역시 Aria da Capo를 누구의 연주로 들을 지를 놓고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와 나의 시선은 텅 빈 차량에 서 있는 사람이 우리 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 얽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내 차량의 반대편 자리로 멀어져 갔다. 난 메신저 백에서 크리스텐슨의 『성장과 혁신』을 꺼내 들었고 그는 브리프케이스에서 『프랑스적인 삶』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잊었다.

아니 우리가 서로를 잊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난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소설을 읽고 있는 그 남자의 표정을 끝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사실 서른 두 살쯤 되는 남자가 문학 작품을 읽는 모습이란 나로서는 좀처럼 접하긴 힘든 일이다. 그 나이쯤의 내가 아는 사람들이란 모두 어느 정도는 일에 미친 사람들이고 그들의 독서 세계란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학습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거장을 다섯 개 정도 지나쳤을 무렵 책의 절반쯤 되는 부분에서 그가 갑자기 책을 덮었다. 그리고 허공에 시선을 던지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 사소한 행동이지만 그 순간 난 그 남자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홀로 책을 읽다가 갑자기 책을 덮는 것은 더 이상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책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의 날숨은 문장에 대한 몰입도가 지나쳐 현실과 이야기 사이의 얇은 격벽이 사라지는 순간. 완벽한 이해의 순간에 느껴지는 쓸쓸함이 담긴 날숨이었다.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남자가 읽던 그 소설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긴 것은……

『프랑스적인 삶』은 매우 쉬운 소설이다. 더구나 등배에 실린 광고문구처럼 ‘공감’이라는 표현이유효적절한 소설이기도 하다. 뒤부아의 매끄러운 이야기 전개와 나무랄 데 없는 구성은 대가들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이 소설이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소수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거느릴 것이고, 십오년쯤 뒤에도 ‘『프랑스적인 삶』 읽어 봤어요?’란 문장과 함께 서로의 비밀스러운 기호를 확인하는 공통의 소재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프랑스적인 삶』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은 여기까지이다. 그 이상의 영광을 얻기에는 이 책은 아주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사실 어느 부분이 문제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대답은 없다. 이것은 그저 막연한 느낌의 문제일 뿐이다. 이 책에는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책들이 지니는 그런 품격이 아주 조금 모자란다.

사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난 끊임 없이 문제의 남자가 날숨을 내쉬었을 부분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이내 나의 날숨으로 그의 날숨에 대한 탐색은 중단되었다. 『프랑스적인 삶』은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소설이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적인(française)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은 소설이기도 하다. 뒤부아는 소설 속에 누구나 상상해 봤을 어떤 삶과 미래 혹은 과거를 투영하고 있으며 그 삶은 상상과 현실에 애매하게 걸쳐있다. 어떤 사람들은 『데미안』에서 나이에 따라 혹은 기분에 따라 매번 새로운 감상을 갖게 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내 삶에서 이 책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나이를 먹어가며 책장을 펼쳐보고는 지금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는 그런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