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랭보를 훔쳤는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난 스스로를 ‘노련한 추리 소설의 독자’라고 추켜세우고는 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경험의 양에서나 추리의 정확도 면에서나 어디 하나 나무랄 바 없는 좋은 독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랭보를 훔쳤는가?』라는 거창한 제목의 소설 앞에서 내 자부심은 꼬리를 내리고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소설의 맨 끝장에 이르고 나서도, 심지어 이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도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명확한 어조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 모든 추리 소설-혹은 추리 기법이 적용된 소설-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명쾌한 해설 없이도 이 소설은 충분한 재미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의 표지. 번역판에 비해 소설의 구도를 보다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누가 랭보를 훔쳤는가?』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의 추리 소설은 아니다. 게다가 형태상은 한 권의 책이지만 실제로는 두 권의 소설이나 다름없다. 드 스말트의 사건 이야기와 비텔뤼스의 진짜 이야기가 그것인데 두 개의 이야기는 두 명의 작가에 창작된 것을 광고라고 하듯 접근 방법과 문체, 구성이 확연하게 다르다. 하지만 두 개의 이야기가 지니는 긴밀한 연결성은 결국 하나의 완벽한 소설을 이룬다.

  랭보라는 이름의 위대한 시인은(난 ‘오필리아’를 제외하고는 그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 전체로서는 그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드 스말트라는 인물에게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평범하지 않다. 그가 경찰이 된 이유로 바로 랭보의 두개골 탈취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그가 좋은 경찰이라거나 훌륭한 추리력을 지닌 인물이란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진실은 그가 찾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진실이다. 다행스럽게 그가 찾기를 바라던 진실과 조우하게 되지만 진실은 그녀의 가장 절친한 벗인 착각과 함께 찾아오는 법이다. 결국 그는 랭보의 두개골에 얽힌 사건을 매듭짓겠다는 서원을 이루었지만 대신 두 건의 살인 사건과 한 건의 자살을 놓쳤다. 사건의 구조와 살인의 동기를 놓쳤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그는 맹세에서 해방되었고 사랑이란 것도 얻었다. 그리 오래갈 것 같은 사랑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은 비텔뤼스라는 주인공이다. 그의 몰이해와 어리숙함은 되려 그를 사건의 중심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는 그가 보고자 하는 진실이 어떤 빛을 띄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가 쫓아가는 길에 놓인 것은 연약하고 작은 희망뿐이다. 잿더미 같던 그의 삶에서 500프랑과 함께 시작된 작은 불씨를 따라 무작정 길을 걷는 그를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평온하고 따스한 마무리에 안도감이 드는 내 마음을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현실에서라면 그런 캐릭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인 사건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조심스레 겹치다보면 웃지 않으려야 웃음을 멈출 수 없는 한 편의 촌극이 펼쳐진다. 아니 촌극과 웃음이란 단어는 온당하지 못하다. 거창한 살인 사건의 이면에 담긴 진짜 삶은 그저 소박하고 희망적이란 사실이 이 소설이 그리고자 했던 진짜 메세지가 아니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각각의 소설은 그것이 창작된 문화적 환경에따라 다른 향을 내품는다. 만약 이 소설이 미국에서 쓰여 진 소설이었더라면, 혹 영국이나 독일에서 쓰여 진 소설이었다면 사건의 전개가 이렇게 발랄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프랑스 소설이기에 용납될 수 있는 다소간의 격정적인 몰입-다시 말해 어떤 유치함이다-덕분에 생기가 넘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텔뤼스의 이야기가 어쩐지 바이어트의『소유』와 비슷한 냄새를 품기고, 드  스말트의 캐릭터가 의외로 소설의 캐릭터로는 흔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