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들, 자살하다

소피아 코폴라의 <Lost in translation>이 유명세를 타기 전 그녀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처녀자살소동(the virgin suicides)>를 통해서였다. 유치한 역제가 내 심기를 건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파격적인 소재에도 꽤 괜찮았다. 되려 한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함이 나를 사로잡기도 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스파이더 맨>에서 리버스 키스신으로 나와 친구들을 탄사를 자아내기 이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금발 소녀가 한 사람의 배우로 자라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ER에서도 잠시 등장하지만 TV 시리즈니까 논외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럭스를 연기한 키얼스틴 던스턴보다 메리를 연기한 A.J. 쿡의 외모에 더 끌렸지만 이제와 낡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일은 좀 부질없어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꽤 오랫동안 난 영화 속의 이야기가 그저 시나리오인 줄로 알고 있었다. 몇 달 전 서점에서 우연히 원작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영화는 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 기저에 90년대 초엽의 명랑함을 깔고 있으며, 사건의 세부묘사에 집중하기 보다는 제한된 표현의 틀 안에 이야기를 짜맞추려고 노력했다. 반면 소설은 70년대 중반을 사실적 색채로 그려내고 있다. 더욱이 필름에서는 영화적 서사를 위해 핵심적인 플롯을 꽤나 건너 뛰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풀리지 않았던 미진함과 인물 사이의 간극은 소설을 통해서는 손쉽게 풀린다. 문장이 아니라면 그 어떤 장르로도 이 소설이 그려내는 사건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처음 책등에 인쇄된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견될 만한 작품이라는 광고 문구에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어쩌면 먼 훗날 가장 위대한 성장 소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리 높은 가능성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이 소설에 관해 논평하기란 쉽지 않다. 흠잡을 데 없는 이 소설이 널리 알려지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고, 걸작으로 살아남기에는 1%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집어내기는 어렵다. 그저 꽤 많은 책을 읽어오면서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감이라는 것인데 내 심장과 머리를 뒤집어 놓은 그 ‘싸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기백을 압도하는 박력의 부제는 이 소설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조금은 어둡게 만든다. 어쩌면 이런 내 감상은 미국 작가들에 대한 그동안의 내 실망과 이 소설을 제외하면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소설을 써내지 못한 작가의 탓도 있다.(제프리 유제니디스는 몇 해 전 『미들섹스』라는 작품으로 풀리쳐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주목받을 만한 작품인든 아니든 간에 남녀추니 Hermaphroditus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좀 괴기스럽지 않을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미시간주의 교외도시에서 벌어진 리즈본가의 다섯 자매의 자살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철저히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유지한다. 사건은 이웃 거리에 살던 ‘나’를 통해 중계되는데 사건의 전개와 함께 ‘나’와 친구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장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 정작 발견해야만 했던 것을 발견해내지 못한 관찰 놀이의 후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회환과 죄책감. 흐릿해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루지 못한 운명에 대한 한 조각의 미련이 자아내는 향은 정말 싸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자살이라는 주제를 무모할 정도로 심각하게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적절한 ‘거리 두기’와 장면의 전환, 관찰자의 시점이동에 따라 독자는 더욱 뚜렷하고 섬세하게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사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첫 번째는 만약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언제쯤 이 소설을 권할 수 있을지 고민된다는 생각이었고, 두 번째는 내 형제들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사연과 강도는 다를지언정 나 역시 이 책에 등장하는 소년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이 소설은 정말이지 『데미안』과 비슷하다. 문장마다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들이 묻어난다.『데미안』처럼 이 소설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거울 속에 비치는 상이 감정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까지 닮았다. 짧은 문장으로 이 소설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바보처럼 글자를 적어내려 가는 어리석음을 어째서 자초하는지 모르겠다.

P.S.
언제인가 결혼이라는 굴레를 굴레로 여기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다면 둥그런 허벅지를 베고 누워 이 책을 읽어주고 싶다. 단락마다 내가 가졌던 느낌을 설명하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질지도 모르고 그것은 나에게 확신이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