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인 <라 트라비아타>의 전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음악이 마음을 매만져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독과 방황으로 점철된 삶을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으며 말 없는 응원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울적한 마음에 술 한 잔이 청하고 싶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 곡을 찾게 된다. 뒤마 피스의 본래 이야기가 졸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기억을 돌이켜 보면 내가 처음 라 트라비아타를 접한 것은 17 살 봄으로 기억된다. 지금에야 클래식 음반들의 주요 판로가 된 패키지 판매지만 그 당시만 해도 패키지 상품의 수는 다양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당시 내가 노리던 패키지는 EMI의 세라핌 시리즈였는데 썩 나쁘지 않은 공연을 저렴한 가격에 CDP안으로 초대할 수 있다는 장점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들인 세라핌 시리즈의 오페라 시리즈에 포함된 것은 <라 보엠>과 <라 트라비아타>, <아이다>와 <토스카> 였고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들이다. 물론 그때의 나는 특별히 누구의 지휘를 좋아한다든지, 소프라노와 테너를 차이를 구분하는 수준에 이르지도 못했고, 사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La Traviata performed by ENO

어찌되었던 이렇게 시작된 라 트라비아타와의 만남은 꾸준히 계속되었음에 도 기실 오페라를 직접 본 것은 작년의 일이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토트넘 코트에 클래식 매장이 어마하게 큰 버진 레코드숍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디뉴 리파티의 음반을 찾으러 갔다가 친절하고 예쁘기까지 한 점원으로부터 ENO에 대한 소개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ENO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과거 새들러즈 웰즈 컴퍼니였다는 부연 설명을 듣는 순간 한물간 삼류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이후 식민지의 이탈과 함께 시작된 오페라단의 감원으로 어려움을 겪던 난 소프라노가 지친 몸을 의탁하던 문제의 장소. 뭐 나처럼 소설에 미친 사람에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들려볼 만한 이유가 된다. 더욱이 소설 속에 묘사된 런던 팰러디움과 함께 20세기 초반 제국주의 양식의 건축물의 화려함을 보여준다는 런던 컨실리움을 보고 싶은 욕망을 꺾을 수 없었다.

ENO의 특이한 점은 오페라를 영어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영어라는 사실이 귀에 거스렸지만 편견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수 십 년 동안 개작에 개작을 거듭한 번안이 놀랄 만큼 선율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노래 부른다는 점에서 표현의 전달력이 이탈리아어보다 높았다. 사실 몇 단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듣는 아리아보다는 그래도 귀에 익숙한 언어로 듣는 노래가 한결 더 마음에 와 닿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런 언어적 특성은 배경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내가 본 <라 트라비아타>는 1830년대 더블린을 배경으로 당시 더블린이 자랑하던 환락을 원작의 파리만큼이나 빼어나게 묘사하고 있었다. 연극처럼 잘 꾸며진 배경과 과감하게 손 본 번안은 매끄럽게 맞물러 돌아가고 있었고, 가수들은 넓은 극장을 가득 채울 만큼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에 그들의 목소리가 지닌 풍부한 감정과 젊고 아름다운 소프라노까지 더해 진다면 더 이상의 공연에 대한 감상은 쓸모없는 첨언이 될 것이 분명하다.

La Traviata performed by Teatri Real Madrid

화려한 명성에도 비싼 입장권이 아까운 공연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예상보다 이런 공연들은 많다. 피치라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예술 감독의 지휘에도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라 트라비아타>는 그저 그런 공연임이 분명하다. 양분된 무대의 화려함은 빼어났으나 어람용 공연장의 음향 반사는 오페라에 적합하지 않았고, 가난한 내가 살 수 있었던 3층에서 보기에 주역들의 성량은 모기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으며, 관능미 넘치는 육신의 아름다움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벨칸도 창법은 고사하고 단조로움의 재배 아래 있었다.  브린디시를 주도해야 할 합창은 얼음처럼 뻣뻣했으며, 프라마 돈나는 리릭 소프라노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이기보다는 수브레토에 가까웠고, 주연 테너는 베이스 부포에 가까웠다. 뭐 그래도 2막의 제르몽과 비올레타의 앙상블부터 3막의 알프레도, 비올레타, 제르몽, 듀폴의 앙상블은 그나마 좀 나았지만 이 오페라의 수준은 진행 중에 브라보가 고작 한 번 밖에 터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충분하다.

관능적인 소프라노와 모델처럼 시원하게 생긴 테너들이 무대의 장악한 이 시대는 한 편으로는 눈이 즐거워서 반갑지만, 한 편으로는 이것은 좀 아니다 싶기도 하다. 아름답고, 노래까지 잘 부르는 재주 많은 가수들을 원하지만 선량한 마음보다는 심술을 부릴 때가 잦은 신은 결코 재능과 행운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눈이 즐거우면 귀가 좀 덜 즐거운 법이고, 귀가 즐거우면, 눈이 좀 덜 즐거운 법이라는 법칙에 순응하는 수 밖에.

오페라를 보기 전 친구에게 피치의 전매특허인 상반신 누드의 무용수들이 등장할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 말을 전반만 맞았고, 나머지 절반은 틀렸다.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자신감 없는 무용수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설픈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쏜살처럼 사라져 버린 무용수들 앞에서 무어라고 말해야 하나. 관객들이 바라보는 것은 벌거벗은 무용수 한 사람이 아니다. 관객의 처지에서 벌거벗은 무용수는 그저 극의 진행상 보이는 배경의 하나일 뿐이다.

사실 화려한 투우사의 노래와 멋진 집시의 춤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이만저만 실망인 공연이 아니었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꼭 집어 말할 만큼 큰 실수는 없었던 듯싶다. 그러나 무언가 탁월한 감동으로 내부를 진탕 시킨 것 또한 없었다. 그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무대와 아름다운 가수들의 재주를 바라보는 동상이 된 기분을 빼고는 내가 얻은 것은 없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양철 인간이 된 것처럼 객석에 앉아있는 나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낯설고 또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