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igliani and His Models

때때로 갤러리를 방랑하다 보면 남자 큐레이터들의 부재(혹은 빈곤, 드뭄)가 아쉬운 상황과 조우하게 된다. 뭐랄까? 회랑을 걷다보면 거세되어버린 거장들의 초라한 초상을 목도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거장들에게도 벨트 아래의 이런 저런 불장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도덕 교과서만큼이나 재미없는 디스플레이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 나오곤 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저 내가 여자들의 시선을 모르듯이 여자 큐레이터 역시 때로는 거장들의 시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선은 공부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얻어진다. 컨텍스트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라는 이야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그림이 작가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대부분의 거장들이 남자들인 미술사적 현실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키는 동성의 인물들에게 조금 더 친숙하다. 사랑이 스무살 넘은 사내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가 된다는 문장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그림 역시 그렇다. 그림 속에 담긴 인물에 대한 작가의 미묘한 태도를 잡아내는데에는 ‘그림을 보는 눈’ 대신 스스로의 과거를 잠시 되돌아보는 여유면 충분하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이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미묘하게 잘 포착해내는 그의 디스플레이에 열광하게 된다. 이 묘한 정서적 공감대를 문장으로 옮기기란 어렵다. 이 공감대를 표현하는 일은 보수적인 한국 남자에게는 암묵적인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고 설령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좋게 보일 꺼리라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던 다시 전시회로 돌아가서 지금까지 나는 모디글리아니를 특이한 상상력을 지닌 20세기 작가로 분류했다. 특이한 형태를 지닌 유화를 남기고 간 알콜 중독자에 폐인, 아니 그의 정부를 미술사에 남기고 사라져 버린 불량한 남자가 내가 그에 대해 지닌 인상의 전부였다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견해 뒤에는 그의 정부에 대한 숨기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그림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그의 시선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나의 공식적인 견해가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해 졌다. 그는 어느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거장이 되었을 운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재능은 세간의 평가가 아닌 그의 작품에 녹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는 유행에 앞서가나 뒤쳐지지 않은 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인물을 해석하는 단호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숨기고 싶은 호기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의 그림을 보는 순간 Jeanne Hebuterne이란 존재에 매료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디글리아니가 얼마만큼 그녀를 사랑했고, 그가 무엇을 그녀에게 선물했는지가 분명하게 들어난다. 그녀의 비극적인 자살이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연적인 운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운명 자체가 태초에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라면 더 이상 사족은 불필요하지 않을까?

진짜배기 삶과 진짜 사랑이 담겨 있는 작품 앞에서 이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랑 하나뿐이고 아름다움 하나 뿐이다. 갤러리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 사실이 내 삶을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때로는 그 말에 긍정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중요하다. 끝으로 좁은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감정의 변화를 능수능란하게 포착해낸 큐레이터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고작 다섯 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플라토닉 러브와 진짜 사랑의 차이가 색채와 선, 음영의 변화를 통해 가시적으로 들어나는 경험을 해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경험을 선물해 준 큐레이터와 그 경험이 고작 6파운데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