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 나는 책은 『뉴욕 삼부작』이다. 90년대 후반 빨간색과 노란색, 그리고 검정색이 뒤엉킨데다가 고딕체의 딱딱한 제목이 인상적인 페이퍼백을 보는 순간 난 이 책이 금주령 시대를 다룬 마피아 소설이 분명하다고 단정지었다. 혹자는 이런 나의 성급함을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8~9년 전의 폴 오스터는 아는 사람만 아는 곰돌이 푸가 즐겨먹는 달콤한 꿀 같은 존재였다. 소리소문 없이 지인들의 입으로만 회자되면서 소설의 의미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소설. 당시의 폴 오스터의 이미지는 대중적이기 보다는 조금은 패셔너블한 스놉들의 아이콘이 아니었나 싶다.

90년대 후반에 폴 오스터를 좋아한다는 말을 흘리면 사람들의 반응은 잘 모르는 작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응’ 이라는 짧은 종결형 대답이 주류를 이루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시점부터 폴 오스터를 인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울러 폴 오스터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만나기 힘들어진 시점이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다. 개정판이 나오고 신간들이 속속 번역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책들에 대한 진지한 리뷰 역시 끊겼다. 과거에는 문장 하나의 의미를 놓고 시끄럽던 지인들이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근래에 번역된『브루클린 풍자극』을 통해 만나 본 폴 오스터는 과거에 그가 지니고 있던 번뜩이는 재치를 상실하고 있었다. 아니 과거의 그를 특징지었던 번뜩임은 여전히 묘사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소설은 여전히 ‘폴 오스터票’로 부를 만 하다. 그의 소설에서 그가 지니는 특유의 지문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보다 전개가 매끄러워졌고 기법이 세련되어졌다. 하지만 까닭 없이 편안한 분위기로 술술 읽을 수 있다. 번뜩이는 재치가 완벽한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을 때 그를 사랑했던 독자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까? 그의 소설은 분명이 예전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이 되었다. 하지만 쉬운 소설이 된 대신에 사람들 미치도록 괴롭히던 수수께끼가 사라져 버렸다. 이제 그의 소설에는 성공한 작가의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독선적인 어조로 까지 비칠 수 있는 가장 긴 혼잣말이 되어 버린 듯싶다.

한편으로는 오래 전 열정적인 시기를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폴 오스터는 점차 완성되어 가는 작가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그가 지녔던 광기에 가까운 재치 대신에 점차 능숙해져 가는 세련미가 소설 전반에 풍긴다. 한 십 년쯤 뒤에는 그 역시 대가에 근접했다고 인정받을 만한 소설을 써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진짜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설픈 소재와 훈계조의 우월성을 버려야 한다. 아울러 그가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몽환적인 세계의 종착역을 선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공한 중견 작가가 된 그이지만 더 이상 비판적인 지지자들은 남아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남아 있었더라도 『브루클린 풍자극』에 사용된 몇몇 치명적인 실수들은 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개인적인 기준으로 평가해 보자면『브루클린 풍자극』은 85점짜리 소설이다. (공정한 평가 기준을 적용하자면 90점 대 초반의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답지 않은 결론과 그답지 않은 비난이 노골적이기에 깍 인 평점과 과거 그를 좋아하던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 감점의 주 원인이다. 하지만 폴 오스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가장 좋은 시작이 될 것 같다. 브루클린에서 벌어지는 따스하고 유쾌한 촌극에 가담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책을 펴라. 이 책이야 말로 근래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가장 높은 정서적 만족을 가져다 줄 소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