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라무슈

돌이켜보면 유치한 노릇이지만 애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아사다 지로의『칼에 지다』를 읽기 전까지 사토 겐이치가 유쾌하고 발랄한 문장으로 풀어낸 『이인의 검객』을 더 좋아했었다. 달타냥과 시라노 드 벨주락이라는 누구나 알만 한 두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활극소설에 끌렸던 것은 읽는 재미란 것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당시의 설익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조금 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삼총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달타냥의 아버지가 남긴 ‘강철 같은 주먹을 유산으로 남겼다.’란 문장에 반했던 소년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과 이후의 복고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드몽 당테스의 복수극에 미친 듯이 몰입했던 나도 떠오른다. 이런 과거들 때문에『검의 대가』를 읽는 동안 펜싱 마스터들의 검보를 구해서 보고, coup de la mouette라는 『전날의 섬』에 등장하는 살인법에 열광했던 것이 아닐까? 『스카라무슈』를 여는 첫머리로는 다소 뜬금없지만 이런 과거가 없다면 이 소설의 재미가 조금은 반감될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을 숨기긴 어렵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스카라무슈』는 다채로운 활극소설이다. 작가는 사랑과 증오, 복수와 비밀이란 날줄로 등장인물 사이를 연결하면서 한 시대를 섬세한 태피스트리처럼 그려내고 있다.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the robe, the buskin, the sword라는 삼부로 나뉘는데 각각의 부제는 앙드레 루이라는 주인공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제시한다. 법복을 뜻하는 robe와 배우가 신는 무대용 반장화를 뜻함과 동시에 비극을 의미하는 buskin. 각각의 부제는 변호사로 시작해 스카라무슈를 연기하는 배우로 변신했다가 펜싱 마스터가 되는 주인공의 이력을 꽤 균형있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럼에도 전형적이다. 영어로 쓰였음에도 이 소설은 프랑스 희극적 전통에 충실하다. 오해로 벌어지는 갈등의 증폭, 사랑에 눈이 먼 자신을 숨기기 위한 헛된 복수의 맹세, 출생의 비밀과 복수의 아이러니. 개인적 문제가 사랑의 비극의 실마리가 되고, 이내 가정 비극이 되며, 종국에는 사회 비극이 되어버리는 상황은 『렉스 오디이푸스』이래 어느 이야기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stcck character가 되어버린 스카라무슈라는 코메디아 델아르떼에 등장하는 책략에 능하며 표리부동한 인물(때로는 어리석지만 유쾌한, 과장된 허풍쟁이)을 통해 작가는 주인공 앙드레 루이의 내적 갈등과 외적 갈등. 표현의 괴리와 자조적인 독백을 자연스레 표출시킨 점만큼은 수준급이다.

사실 이 소설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재미다. 누구나 한 번쯤 어떤 제목조차 모른 채 채색필름으로 봤을지 모를 이 소설의 줄거리를 망각하는 재주만 있다면 책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다. 통쾌하며, 냉소적이며, 주저함을 모르는 스카라무슈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현대 소설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진력이 난 독자에게 좋은 해갈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