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July 2015

1. 장서인

언제부터인가 서재방 책장에는 늘 장서인이 꺼내져 있다. 이유야 문구 상자를 꺼내지 않아도 손쉽게 장서인을 찍기 위해서라지만 사실 근래 들어 장서인을 쓸 기회가 많지 않다. 과거보다 책 읽을 시간도 줄었고, 설령 읽는다 하더라도 장서인을 찍을 자격이라고 다짐한 리뷰를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정리하다 호기심에 장서인을 살펴보니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처음 손에 들었던 순간처럼 정갈하다. 이제는 세상과 타협할 줄 아는 서른 중반이 되었으니 꼭 리뷰를 쓰지 않더라도 장서인을 찍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장서인이 없으면 읽은 책인지, 안 읽은 책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2. Apple Music 그리고

이번 주부터 애플 뮤직을 듣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이 추천한 음반 가운데에는 이미 가지고 있는 음반도 많지만, 가끔 존재조차 몰랐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음질은 Itune Match보다 조금 떨어지는 것 같고… 그러던 중 안나 네트렙코가 2007년 바덴바덴 오페라 갈라에서 부른 Casta Diva를 듣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즐겨 들었던 버전은 마리아 칼라스 플래티넘에 실린 정결한 여신이었는데 네트렙코의 정결한 여신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칼라스의 유려한 장중함은 없지만 청아하면서도 깊이 있다. 아무래도 이 앨범은 사들일 것 같다.

덧붙여 교보문고 음반코너에 드디어 명연주 명음반 섹션이 별도로 생겼다. 인터파크에서는 오래 전부터 있었던 섹션이지만 조금 더 앨범을 편하게 살 수 있어서 편해질 것 같다. 다만 함정이 있다면 일주일에 사나흘 밤을 자는 춘천에는 오디오가 없다는 사실이고, 잠실집에서는 아기 지우 때문에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없다.

-이야기와 별개로 자정이 가까워지는데 시칠리아섬 타오르미나의 구석진 가게에서 먹었던 노르마가 떠오른다. 참 다채로운 맛이었는데…

14 November 2013

1.
11월의 어느 추운 밤. 아내는 기절하듯 잠들었고, 난 오랜만에 음악을 듣고 있다. 아니 날마다 FM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지만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음악을 듣는 밤이다. 피레스가 연주하는 슈베르트 소나타는 브람스보다 더욱 이런 밤에 어울린다. 아니 이런 밤에는 오이스트라흐의 프랑크 바이얼린 소나타도 피레스의 섬세하면서도 박력있는 연주를 넘보지 못하리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초콜릿을 입에 물고 있자니 이제야 피곤이 조금은 사라지는 기분이다.

해마다 어김 없이 찾아오는 11월의 병이 올해도 또 찾아왔다. 11월의 병은 꿈속에서도 일을 하는 증세로 시작한다. 평소에는 내 삶과 회사를 그렇게도 잘 구분하는 녀석이 11월만 되면 경계가 흐릿해진다. 마음쓰지 않아도 될 일들을 신경쓰고, 마음을 써야 하는 일들에는 무신경해진다. 어서 11월이 끝나고 평화로운 12월이 오기를 바라지만 시간은 늘 그렇듯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2.
일년에 한 권씩만 읽겠다는 매그레에 대한 내 다짐은 아내가 매그레에 매료되면서 위협을 받고 있다. 난 이제 고작 네 권을 읽었을 뿐인데 아내는 무서운 속도로 전집을 넘기고 있다. 나에게도 책을 사랑하던 영혼이 있던 옛날이 있었음을 마음은 기억하는데 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어느새 내 기억의 궁전은 약탈 당한 듯 빈곤해졌고, 단단하게 짜져 있던 서가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 난 스스로가 회색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끝없이 되뇌이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기의 내 기억의 궁전만큼은 화사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공허한 빌딩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즘은 그 시절의 회색 인간 타령이 얼마나 유치한 투정이었는지를 깨닫게 만들어주는 참회의 시간이다. 진짜 회색 사무실에서의 삶을 보상해주는 아내와의 행복한 시간이 없다면 지루한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날마다 새롭게 쓰이는 인간의 졸렬함의 한계를 목격하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늘어나는 잔고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에…

3.
신기한 것은 이렇게 꺼져가고 있는 마음이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나오는 한 시퀸스를 떠올리고는 즐거워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에딘버러 기차역 부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기념물에서 엇갈리는 두 남자를 담고 있는 장면에 이어, 비에 젖은 스코틀랜드의 날씨가, 그런 날씨를 보상해주는 아름다운 정원이,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시가지가, 저 멀리 북해가 보이는 에딘버러 성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스물 여섯 10월의 에딘버러 여행을 시간 순서대로 기억해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여행과 함께 비바람과 풀냄새도, 구두에 괴롭힘을 당하는 포석이 울어대는 낮은 으릉거림까지도. 스물 여섯의 2박 3일을 복원해낼 수 있다면 폐허가 된 내 서가도, 기억의 궁전도 다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20 September 2013

1.
오랜 고민 끝에 태터툴즈, 텍스트큐브를 거쳐 2003년부터 써왔던 블로그를 워드프레스로 옮겨왔다. 임포터 덕분에 텍스트큐브 초기 시대의 포매터로 작성된 글의 정렬이 깨진 문제를 제외하면 지난 10년 간의 내 삶의 기록은 무사하다. 하지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기술로는 내 추억을 온전히 옮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 처음 블로그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을 때에는 날마다 저마다의 문체가 묻어나는 아름다운 글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시절부터 읽던 블로그 가운데 살아남은 것들은 소수다. SNS의 홍수 속에 예견된 길을 걸은 것 뿐이겠지만 젊은 시절을 기쁘게 만들어 주었던 그 아름다운 옛글들이 때때로 그리운 것은 사실이다.

2.
작년의 인사이동으로 난 FTA와 관련된 일을 보고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에 백팩을 맨 학생들을 보게되면 나도 모르게 대학 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에 알았던 FTA와 지금의 FTA를 비교해보게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F~king Trouble Area인 것은 변함 없지만 항상 논란이 되었던 것은 가장 불필요한 부분이고, 가장 필요한 부분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습다. 하긴 10년 전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10년 전에 예상하던 모습 가운데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은 애플과 구글뿐인 세상인데…

3.
열아홉의 난 무모하게도 수업 따위는 듣지 않고 창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를 관찰하며 가을이 오는 모습을 관찰하곤 했다. 가을비가 한 차례씩 내릴 때마다 바람은 차갑게 식어가고, 공기에는 가을 특유의 건조한 눅눅함이 베어들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단풍이 지고 낙옆이 어지럽게 떨어질 즈음이면 십대도 끝나가리란 공상에 젖어 있었는데 그후로는 한번도 제대로 가을을 관찰해 본 기억이 없다. 가을은 늘 짧고 바쁜 것이서 그럴 틈이 없었다는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느릿하게 걸으며 아내와 함께 가을이 오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다.

4.
십년이 조금 못되는 시간 동안 즐겨 읽던 블로그에 새로운 종류의 ‘서재 결혼 시키기’가, 그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청첩장이 올라왔다. 사실 학생 시절 난 학교 박물관에서 그를 몇번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내 삶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도 그와 비슷한 외로움의 궤적을 따라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못된 마음이지만 그 생각이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삶과 글이 아무리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말이다. 몇년의 세월이 흘러 내가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것처럼 이제는 그가 외롭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웃음짓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