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론이 주변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의 말대로 소설 따위는 읽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어린 벗을 보면서 문학이야말로 논픽션보다 더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법이라고 설명하는 내 자신이 귀찮아졌다. 위대한 생각과 영혼을 낳는 것은 항상 허구라는 상상력에서 태어난 진실이다. 사실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사실에 불과하다. 사실은 진리를 낳지 못한다. 하지만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1미터의 책과 5만엔 돈’이라는 인용구를 듣는 순간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지식의 방대함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와 넓게 열린 접근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 자체가 생명력 없는 객체에 불과했던 때는 단 한순간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은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독서론이 있는 만큼 경계해야 할 독서론도 있는 법이다. 어린 벗에게 무교양의 지름길을 안내하는 다카시의 독서론이 바로 그렇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도 아버지와 문학과 논픽션 사이에서 자주 부딪힙니다. 전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고, 아버지는 지식책을 추구하시거든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소설이란 허무맹랑한 허구’라고 하시는데, 전 거기에 반대하며 ‘오히려 소설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라고 말하곤 하죠. 그래서인지 제 방에는 소설 책이 넘쳐나고, 아버지께서 쓰시는 책꽂이에는 지식관련 책만 수두룩합니다. 물론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소설에서만큼 현실에 지식을 잘 반영한 책이 있을까요? 꼭 이런 부분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도 문학은 충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공감을 느껴 댓글 남기고 갑니다.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애서가로 불리는 누군가의 독서론을 비난했습니다만 사실 저 역시 소설보다는 전문서적이 더 많습니다. ‘허무맹랑한 허구’에 불과한 소설들이-그럼에도 이런 소설들도 존재해야 제대로 된 소설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소설들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세상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소설들을 포기한다면 소리 없는 무채색의 삶이 되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없는 세상에는 말이 필요없을 것이고 우리는 단 하나의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만 살게 되지 않을까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1984년> 같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살만 루시디는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서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 발화와 자유로운 상상력이란 그림을 그려 내고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 씩씩거리기도 했지만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에서 청장관 이덕무가 주인공에게 아직도 세책방에서 방각 소설들을 사다 읽느냐고 물어보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설령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소설을 읽는 그 마음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링크를 걸어 놓지는 않으셨지만 실례가 되는 방법으로 블로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정신 없이 읽다가 답글을 남기는 참인데 자주 방문해도 될까요?
실례되는 방법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방문을 막을 이유야 없죠. 그런데 한참 동안 정신없이 읽으셨다니… 제 블로그에 글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닌데, 제 블로그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맞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작년 한 해동안 국내에서 발간된 신간만도 4만 5521종류에 달하지만 실제 한국인의 독서량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성인의 24%는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으며, 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