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게 불평하다

1.
좋아하는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마다 내 마음에는 기이한 파문이 인다. 사람들의 관심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경험에서 비롯된 노파심과 사람들과 감동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속 좁은 내 마음에 일으킨 짜증스러움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영화가 소설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을 때 감독과 극본가를 맹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Kite runner>가 개봉했다. 내가 상상한 아미르와 하산의 어린 시절이. 소라브를 구하기 위한 아미르와 아세프의 결투가, 정감있는 바바의 눈매가 영화를 통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소년 시절부터 비역질을 즐겼으며 유아성도착증까지 두루 갖춘 탈레반 아세프는 내가 읽은 수많은 책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악역이었는데 그는 또 어찌 묘사될까?

몇 달 전 어톤먼트를 보며 두 소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한 적이 있다. 브로니는 자신의 비겁함에 대한 속죄로 그들을 위해 가장 행복한 허구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아미르는 그의 이복형이 하산이 그에게 건넨 ‘for you. a thousand times over’ 말을 그의 양아들이자 조카인 소라브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화면으로 만나는 일은 필경 기쁘기 한량없는 일일 테지만 마음속 깊은 곳의 보물을 강탈당한 기분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이언 매큐언에 관해서 갑자기 떠오른 사실인데 그는 맨 오브 부커의 수상자가 되고, 두 차례나 숏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다음에야 입양된 형을 만났다고 한다. 미장이로 살아가는 대가의 형은 그의 부모가 결혼하기 전 불륜 관계일 당시에 얻은 자식인데, 이언의 어머니는 당시 전쟁터로 징집된 남편을 가진 유부녀였고,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더 연대의 장교였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남편이 전사한 이후, 그의 어머니는 정식으로 이언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그 후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소설가와 그의 형은 서로 다른 운명을 살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소설가에게는 가끔 그의 소설만큼이나 극적인 삶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하는 것은, 그날 날씨와 바람, 꽃냄새와 배슬배슬 이어진 사소한 일상사마저 기억하는 이유는 사람 좋은 뵈는 여유나 유난히 좋은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내 삶에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마저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을 정도로 소중하기에 갈무리해야하는 대상은 꼭 연인만이 아니다.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믿어주시는 아버지 등, 고집 세고 별난 아들 탓에 늘 마음 졸이는 어머니의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표정에만 언뜻 나타나는 걱정. 밉살맞지만 가끔 정곡을 찌르는 큰누이, 최근 관리의 대상이 된 둘째 누이,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막내 누이. 항상 내 유치함과 비겁함, 실수를 되돌아 보게 하는 오래된 친구들. 그들 모두는 내 과거고, 현재이며, 미래다. 그렇기에 사진첩에 아무렇게나 넣어두며 가끔 우연히 펼쳐보게 되는 낡고 색이 바랜 사진첩 속에 그들을 놓아두고 싶지가 않다. 그렇기에 난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반추하며 또 반추한다.

3.
내 개인적인 정책 가운데 하나는 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과거 따위는 지워버리고 누구에게나 낯선 타인이 되어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난 좋은 기억 속의 나이던, 나쁜 기억 속의 나이던, 어느 것 하나 부정하거나 지워버릴 수가 없다. 비록 졸렬하고 불편한 과거라 하더라도 한 사람의 역사이고, 그 역사가 없다면 오늘 내가 만난 그 사람은 단지 흐릿한 음영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난 결코 내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 과거를 과거로 남겨두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말이다. 오랜만에 ‘나’에 관하여 설명하거나, 변명할 필요없이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시간에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술자리를 가졌다. 경망스럽게 웃고, 사용법을 잊어버린 얼굴 근육이 바쁘게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동안 다채로운 이야기가 공간을 수놓았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펼쳐진 이야기 속에서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이유가 과거를 존중하는 그녀의 태도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낼 수 있었다. 조금 더 빨리 기억해 냈더라면 지금처럼 무디고, 성겨져, 돌처럼 단단해진 심장과 마주하는 일 따위는 없지 않았을까?

falling in memory

1.
두 해 전쯤 내 절친한 친구인 모는 짧은 문자 메시지 하나로 감정에 쉽게 휩쓸리는 나약한 사내의 낙인을 받고 블라인드 데이트에서 물을 먹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기실 나도 그 곡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감정에 휩쓸린다. 오늘 지하철에서 파티셔플로 음악을 듣다가 François Samson의 연주와 조우하게 되었다. 내 짧은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을 매만지고 지나갔다. 오월의 아침처럼 싱그러운 추억이, 나 홀로 삭힐 수밖에 없었던 삐뚤어진 상처가, 조용하게 불타오르는 염원이, 끔찍하고 잔혹한 복수심이 마음속을 어지럽게 지나갔다. 혹자는 이 곡이 지닌 설명할 수 없는 마력 탓으로 모든 책임을 돌리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속 편하게 그 의견에 동조하긴 아직 어렵다.

2.
<Skins>의 ‘Cassie’라는 에피소드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감정의 홍수에 빠져 버렸다. 거기에 이전 에피소드에서 토니라는 캐릭터가 합창단 앞에서 부른 ‘on the street where you live’를 듣고 있자니 술 한잔이 간절하게 생각난다. 어린 시절 <My fair lady>에 삽입된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출처조차 기억나지 않는 노래가 되어버린 것은 나만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잊어서는 안 될 노래를 잊어버린 것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about a boy>의 그 아름답던 눈을 가진 아역배우가 어느새 자라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보면 그저 시간의 힘에 모든 것이 무색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심야잡상

때때로 늦은 밤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비틀즈를 들으며 책을 읽고 싶은 밤이 있다. 또렷한 눈망울로 창밖을 바라보며소리없이 쌓이는 눈을 구경하고 싶은 밤. 다음날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보내고 싶은 저녁. 꼭 대화를 주거니받거니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갈하면서도 담백한 문체로 쓰인 70년대 수필이나 대가들의 짧은 연애 소설. 너무 어둡지 않은 조명과 따스한 담요 정도.

사용자 삽입 이미지기억을 거꾸로 따라가다 보면 아직 턱수염이 나지 않았던 열 다섯 무렵에는 이런 밤 비틀즈 대신 스팅을 들었고 좁은 문과 달과 6펜스를 즐겨 읽었던 것 같다. 십대 후반에는 아이작 스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와 이름 모를 연주자의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들으며 츠바이크의 단편들을 읽어 나갔고, 스물 초반에는 별 의미 없는 메세지를 보내고는 밤새 답신을 기다리며 무심한 척 핸드폰과 창문을 바라보며 멍하게 보냈던 때도 있었다. 스무 살 넘은 사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애써 믿어버렸기에 이제는 별다른 애잔함조차 남지 않은 나의 사랑.

그때는 너무 괴로워서 어서 잊을 수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기억들도 시간 속에 흩어지고 바래 더는 조각을 이어 맞출 수가 없다. 나에게도 사랑에 들떠 있는 청년 시대가 있었던 것을. 안부 인사를 묻는 점잖은 편지인양 써내려갔지만 행간에는 간절한 소망과 들뜬 흥분을 담고 있었던 서간들로 채워졌던 시기가,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건강한 친구들과 봄바람처럼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맑고 뽀얀 얼굴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때로는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덧없는 한 조각 감정의 먼지에 불과하지만 아주 가끔은 나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었노라고 소리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바쁜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런 외침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마음속에 품은 단호한 결심 때문에 얼굴마저 서늘해진 지인들과 지친 일상에 표정마저 헐거워진 사람들 틈에서 나까지메마르고 건조해졌다. 그리하여 더 이상 산들바람처럼 경쾌한 문장을 쓸 수도,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애정을 듬뿍 담아 안부 인사를 건넬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고 쓰고 싶지 않지만 쓰지 않을 수 없는 늦은 밤의 지껄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