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을!

내게는 지난가을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날이 추워짐에 따라 옷이 두꺼워졌다는 사실과 어둠이 일찍 내려앉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늘 똑같이 바쁘고 여유 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니 가을이 깊어질수록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추운 시기에는 취객으로 가득 찬 새벽 한 시의 마지막 버스를 타는 것이 일상이었다. 배신당할 부질 없는 노력임을 알면서도 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다. 서푼짜리 망한 연극이 되리라는 사실이 매일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올해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작년과 정반대이다. 이사한 지 여덟 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처음으로 산책하는 기분으로 집까지 걸어서 퇴근을 시작했다. 다섯 시에 회사에서 걸어 나와 공사로 번잡한 삼성역을 지나면 하루하루 황량해지는 가로수가 나를 반긴다. 고시 공부를 하며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며 좁은 삼성교를 지나 탁 트인 탄천과 한강을 바라본다.  11시 방향에는 지난가을 새로 그리고, P & L을 뽑았던 주경기장과 야구장이 들어온다.  번잡한 회사 동네에서 딸아이가 기다리는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귀계로 북적이는 복마전에서 벗어나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베드타운에 도착했음을 몸과 마음 모두가 알기에 나오는 웃음이다.

지어진 지 40년에 가까워진 야구장은 내 이십 대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갈수록 줄어드는 노점상 사이로 담배 연기가 솟아오르고 야구팬의 구성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야구장을 지나 주경기장을 만나면 새로운 막이 열린 것처럼 날마다 새로운 퇴근길의 매력을 발견한다. 어느 날에는 김수근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궁궐의 유려한 처마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고, 어느 날은 태양의 서커스를 위해 설치하는 빅 텐트의 반짝거림에 감탄할 때도 있다. 하지만 늘 나를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주경기장에서 체조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가로수길이다. 수령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으나 아파트 8층 높이로 자란 나무들은 말없이 나를 반긴다. 이제 집까지 절반 남았다.

나머지 절반의 걸음은 매일 다르다. 어느 날은 느린 음악에 맞춰 짧은 보폭으로 느리게 걸을 때도 있고, 허기가 느껴지는 날에는 큰 보폭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뒤엎고 전시장과 호텔이나 지으려고 몇 년을 보냈나 하는 후회는 늘 같다. 그리고 그 일을 더 이상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제 마지막 횡단보도다. 아직 이 횡단보도를 기다리지 않고 마법처럼 한 번에 건너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올해가 가기 전에는 그마저도 성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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