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헛한 이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난 어떤 사람일까? 사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나 사이의 차이는 뒷머리를 따끔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어쩌면 어이없을 정도로 맹목적인 호의를 베풀었던 내 행동에 대한 후회일지도 모르고, 때로는 깜짝 놀랄만한 상대의 호의에서 비롯되어 피어나는 웃음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며칠 전 책장을 배회하다가 짧은 메모를 하나 발견했다. 영원히 자기편이 되어 줄 수 있겠냐는 사춘기 소녀에게나 어울릴 법한 친구의 문장이 포스트잇을 채우고 있었다. 메모 읽다보니 그 부탁에 대한 내 대답 역시 떠올랐다. 지금의 나라면 ‘영원’을 믿지 않기에 확답을 피했을 그 물음에 난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 태도로 대답을 했을까? 분명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삶에는 수많은 분기점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모든 분기점을 지나 평생을 함께 걸어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길은 본질적으로 혼자 걸을 수 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 구간을, 어쩌면 서너 구간을 함께 할 사람은 있겠지만 그 누구와도 삶 전체를 함께할 수는 없다. 아니 사람들 모두가 잠재적인 이별의 가능성을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것과 마음은 별개다. 왜 마음은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지, 그 불가능함을 추구하다가 상처 받는 마음이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우아하게 냉혹한 척’ 굴어대는 나는 또 무엇인지. 어째서 솔직하게 다음 구간까지, 혹은 다음 구간까지만 함께 걷자고 말하지 못하는지, 영원이란 거짓말로 상대를 현혹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상대를 외면하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꾸밈 없이 솔직해지기’ 일 것이다. 마음과 표정을 뒤덮고 있는 피갑은 벗으려야 벗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실을 말해도,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두려움을 말해도 그 누구도 진실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결국 나에게 남겨진 일은 저 멀리 제 갈 길로 바쁘게 걸어가는 뒷모습들을 보며 마음속으로나마 작게 행운을 빌어주는 것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부지불식간의 일이기에 ‘안녕’이란 인사말조차 남기지 못한 헤어짐 속에서 말이다. 아무리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엽서는 너무 오래 걸리기에

요즘들어 즐겨 걷는 산책길에는 저울이 그려진 상점이 하나 있어. 유태계 상점이 분명하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채색된 간판을 매일 같이 보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무엇을 팔고 있을지는 관심이 가지를 않아. 그냥 저울이 내 마음에 투사하는 이미지 하나만큼만 선명하게 머리에 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제일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어. 만약에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이야기처럼 우리의 운명을 저울에 달고 판단할 수 있다면 삶이 한결 행복해질까? 대답을 알 수 없기에 그저 푸른색의 저울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아.

의사결정 나무에 제약조건이론을 응용해 문제를 분석해 보면 현재의 내 문제는 세 번의 의사 결정이 필요해. 가장 중요한 의사 결정은 내년에 또 다시 시험을 보느냐이고, 긍정적인 대답을 선택한 경우 다시 휴학을 하느냐, 휴학을 하지 않는다면 학교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가 파생되더라고. 하지만 어느 것도 지금의 나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어. 시험의 결과는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이고 난 무조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거든. 하지만 가능한 그 선택의 시기가 늦게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야. 실제로 두 달 뒤에 선택의 시기가 왔을 때 나에게 주어진 최종 판단의 시간은 고작 두 세시간에 불과할테니까 말이야.

삶은 우리에게 수많은 시련을 강요해. 하지만 시련 따위에 멈추어 선다면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평생동안 알 수 없어. 상황에 따라 최적의 의사 결정을 해야한다는 대원칙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원칙이 시련을 회피하는 변명이 될 수는 없기에 삶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가 우리의 앞 길에 예정해 놓은 파란만장한 시련에도 끝이 존재하지 않을까? 신을 연역해 내는 것처럼 시련 역시 어느 순간에는 끝이 있다고 연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련에도 끝이 있다면 언제인가는 우리가 꿈꾸는 그 길의 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최종 목표를 이십대에 이루어야 할 3가지 것들로 한정짓는 것은 삶에 대한 가장 심각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 있고 우리의 목표 역시 조금은 이상적이어도 된다고 생각해.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야. 그러니 절망도, 실망도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니야. 죽음이 입맞춤 하기 전까지 인생에 있어 진짜로 끝난 것은 없으며 오직 성취해야 할 미래만 남아 있을 뿐이야. 지금껏 우리가 건너온 수많은 갈림길들을 생각하자. 조금 늦게 갈 때도 있고, 더 힘들게 돌았던 경우도 많지만 그 순간 순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만큼 잘 해낼 수 있었을까?

레미제라블을 보다가 그 유명한 바리케이드신에서 난 너희들을 생각했어. 네가 너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너희들이 항상 최고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 하느 만큼 슬기롭게 극복할 줄 알기 때문이야. 아니 조금더 마음 속 깊숙한 부분을 들추어 보자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같은 것은 없어. 신뢰라는 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니까. 내게 있어 너희는 존재 자체가 인생이 홀로 걷는 고단한 것은 아니라는 반증이며, 신뢰와 우정이란 것이 금석문 속의 문구가 아닌 실제 삶과 함께 한다는 증명이야. 그러니 방황은 나중으로 미루자. 삼십년 후에 스물 여섯 가을을 생각할 때 그저 잔바람이 한 번 불었지 하고 웃으며 말할 것이 분명하니 말이야.

P.S.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은 나만 빼놓고 정기전에 가려고 티셔츠 구매 계획까지 세우고 있는 그대들이야. 알다시피 번다한 이십대 초반을 보낸터라 2001년이 나의 마지막 응원이었다고. 갑자기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부쩍 우울해져 오늘은 술을 한 잔 마시기로 결정했다네.

個人 用例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사말은 ‘잘 지내지’에서 파생된 일련의 문장들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거의 쓰지 않지만 개인적인 용법 사전에서 이 문장들은 나는 당신에게 진지한 관심과 선량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며 상대의 기쁨과 슬픔이 나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 아래 사용된다. 보통의 흔한 인사말이 내 용례집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간주되는 까닭은 내가 ‘안녕’ 과 ‘다음에 보자’를 정확하게 구별해서 쓰는 괴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새벽 기차를 타기 위해 잠시라도 누울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밤을 지새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런 밤에는 유난히 ‘잘 지내지’하고 안부를 묻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안부 인사를 건내받는 그들은 실없다 웃어 넘길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함부로 남발하지 않는 꽤나 소중한 문장인 셈이다. 먼 훗날 다시 사랑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그녀가 내가 여행 중에 보낸 ‘잘 지내지?’란 문장의 엽서를 받는다면 그것을 부족한 사랑과 빈궁한 재주에 기인한 것으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다스러운 사람이 말을 아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지한 감정이 녹아 있는 때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잘 지내지?
난 결국 몇 시간이라도 눕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