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렸네. 쌓이지는 않았지만 장갑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은빛 결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네. 너무 아름다웠거든. 나이를 먹어도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눈이 아름답다 생각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신기해. 아직도 눈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았구나하고 말이야.
최근의 내 삶을 보면 효율성이라는 기준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네. 소박함과 여유를 즐기던 나는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마음 아팠던 수많은 과거의 미망에서 벗어나고 나니 모든 것이 덧없다네. 그리고 덧없는 것들 대신에 무언가 실제적인 것들을 움켜잡고 싶어.
브리프케이스에는 공부할 책 한권과 정신을 풍족하게 해주는 양식이 같이 머물러 있다네. 하지만 내 손이 먼저 가는 것은 공부할 책 한 권이야. 옛날의 나라면 후자를 선택했겠지만 지금의 난 전자에게서 더욱 큰 만족을 느낀다네. 설명하기 힘든 문제지만 수식과 이론 속에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네. “교양이란 때때로 Bullshit!”을 연발하던 옛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는군.
오늘은 재정학의 마지막 장을 넘겼네. 정확하게 23일이 걸렸어. 실제 공부한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 날짜에서 5일을 빼줬으면 좋겠구. 18일에 643페이지라 괜찮은 속도가 아닌가? 그것도 독학으로 말이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그 어디에도 할 수가 없네. 그래서 혼자 예의 그 해괴한 웃음으로 자축을 했다네. 날아갈듯 가벼운 기분 위에 조금은 우울한 기분이 뒤섞여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집에 돌아오니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아. 정신 활동은 완전히 정지해 있고 몸 역시 반쯤 잠든 상태라네. 낮동안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정신력을 소모하고 났더니 밤이 되면 몽롱한 의식으로 그저 숨만 쉴 따름이군. 하지만 이런 하루의 삶이 좋다네. 아무런 보답없는 그 어떤 것에 헌신하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한 헌신이니까…
잠이 밀려오는군. 내일 또 하루 최고의 지적 유희를 즐기려면 소모된 정신력을 충전해줘야 한다네. 사실 이런 몽롱한 의식으로 무언가를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도 모르겠어. 또 어리석은이라는 단어와 비야냥이라는 단어가 머리속을 돌아다니네. 왜 이런 단어가 생각났는지 설명을 해줘야 겠지만 말이야. 이제는 쓰러지게 졸립네. 내 머리속 같은 것 알아도 알지 못해도 어차피 무차별한 것이니 나에게 있어 최적 선택인 잠을 벗하는 나를 미워하진 말아주게나.
한주동안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네. 뭐 쓸 의지가 없어라기 보다는 다른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지. 재정학의 공공선택과 정부지출 챕터와 씨름하며 최고의 유희를 즐겼다네. 레베르떼의 소설도 한장 한장 음미하여 읽어주었고 자네의 승주씨가 달아준 답글도 매우 즐겁게 읽었다네. 어째 자유의 몸이 된 자네의 삶이 너무 행복할 것 같은 불길함 예감이 들더군. 좋은 친구를 둔다는 것. 아껴달라 말하지 않아도 사람을 아낄줄 아는 친구를 갖는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최고의 복이 아닐까 싶어.
훈련소에서 알게 된 귀여운 고등학교 후배다. 본인은 귀엽다는 말 자체를 조금 싫어하는 듯이 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귀여운데 어떻게 귀엽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그 무서운 이들이라면 사진 자체를 찍는 것을 불허했을 테지만 이 귀여운 동생 녀석은 이렇게 말한다. “형 모자 쓰고 찍으면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