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ap Opera

사실 내 주변에는 텔레비젼에 대한 편견이 아니 드라마에 대한 편견이 존재했다. 바보 상자 앞에 앉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이 주변에 팽배해 있었다. 집에 앉아서 텔레비젼을 보는 행동은 지적이지도, 활동적이지도 않은 무능력의 상징으로 취급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 영화와 다르게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봤다는 사실은 늘 숨겨야 할 무엇이 되곤 했다.

아니 조금 더 냉정하게 이런 분위기를 이끌었던 요인을 분석해 보면 실직으로 베이비 시터가 되어버린 남자들의 드마라 중독을 목격했던 철없는 우리 세대의 성장기가 들어난다. 입으로는 피오리나 같은 여자라면 기쁜 마음으로 살림하는 남자가 되겠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치욕스러운 미래의 자화상은 일터를 잃고 드라마와 타협만 무능한 중년이 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편견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은 21살 여름에 있었던 여행을 통해서였다. 우리 전공에서는 꽤나 유명인인 교수님의 돌발 발언이 있었는데 요지는 [주말 드라마 할 시간이니 난 이만 들어간다] 였다. 사실 굉장한 충격이였다. 그 당시의 난 텔레비젼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던 철없던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보 상자와의 대타협이 성사되었던 듯 싶다. 스물 셋 내게 주어졌던 3개월의 막간극 동안 난 온갖 드마라 시리즈와 시트콤의 중독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Soap Opera Mania가 된 자신에 너그러워진 것도 이때부터다.

어느 일요일 아버지는 아침상에서 요즘 드라마가 참 재미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가 말한 요즘 드라마는 [미안하다 사랑하다] 였는데 아버지의 설명은 꽤나 감탄스러운 것이었다. 근래의 소설이나 다른 드라마와 달리 여백이 많다는 설명이었다. 독자에게 혹은 시청자에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막아 놓고 제한된 해석을 강요하는 다른 것들과 다르게 [미안하다 사랑하다]는 보는 사람이 차분하게 해석하고 공감하는 재미가 있다고 하셨다.

사실 재미는 공감에서 나온다.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은 설령 아름답고, 멋질 수 있어도 재미나진 않다. 게다가 차분하게 해석할 수 없는 이야기는 너무 어렵거나 너무 싱겁다. 글에서 작가의 완급, 노련미 혹은 호흡이라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차분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인데 내 글도 그러하지만 요즘에는 호흡 조절에 능숙한 이야기들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누가 글을 읽어도 딱 내 호흡이구나 하는 대가다움을 발견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사실 그 아침 식사 이후 우리 형제들은 [미안하다 사랑하다]의 팬이 되어 버렸다. 시나리오를 설명해 달라는 머리 큰 자식들의 요구에 [스토리는! 그냥 상황만 있고 다들 불쌍해. 그러면서 어느 놈 하나 이해 안가는 사람이 없지] 라 대답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다. 형제는 이곳 저곳에서 [미안하다 사랑하다]를 봤다.

시나리오에서 느낄 수 있는 [미안하다 사랑하다]의 특징은 없다. 사실 이 드라마는 매우 기본에 충실하다. 각각의 인물에게는 역할과 상황이 주어져 있고 이야기 전개는 전제된 상황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어느 한사람 모순된 사람도 너무나 첨예해 해소될 수 없는 대립각도 없다. 구차한 설명은 없지만 간결함이 맛깔스럽고 [존재하다] 대신에 [살아 있다]란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 각자의 삶들이 오밀조밀하게 엉켜 있을 따름이다.

사실 이런 특징은 정상적인 극본이라면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어야 하는 특징이다. 하지만 아버지 말대로 꽤나 오랫동안 우린 이런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오래된 희극을 꺼내보며 재미를 느끼는 것도 알고보면 요즘 드라마와 소설의 장황하고 개연성 없는 이야기 전개에 식상해 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등장하는 캐릭터, 상황과 아귀가 맞지 않는 추가 설정, 복선이라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한 변화, 이야기는 빈약하지만 디테일만큼은 지루할 정도로 긴 소모극. 드라마는 소설은 설명문이 아니다. 캐릭터의 감정과 행동에 대해 하나하나 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 보편성에 바탕을 둔 캐릭터에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법일테니까.

나와 친구들이 빈곤한 디테일이라 부르는 요소는 보는 사람의 혀끝에 무거운 느낌을 주는 화학 조미료와 같다. 적당히 사용하면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 잡는 현혹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되려 입맛을 버린다. 요즘 것들이 그렇다. 화학 조미료 중독의 시대에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날 음식에서 특이한 맛이 난다고 느끼는 그런 시대가 시나브로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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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maicha Green

오랜만에 젠마이카 그린을 마시고 있다. 이 녀석과 친해진지는 꽤나 오래되었는데도 녀석을 마시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커피빈에 들릴 때면 늘 이 녀석보다 화려한 향과 맛을 자랑하는 차들에 오감이 마비되곤 하기 때문이다. 지갑 사정이 넉넉할 때면 자스민차에, 날씨가 더울 때면 차이 라떼에,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에프리콧 실론에 빠져든다. 그리고 가끔 사내 녀석들과 원치 않을 걸음을 내딛을 때면 포모사 우롱을 마신다. 이래 저래 젠마이카 그린과 친해지기란 어렵다.

사실 젠마이카 그린의 맛은 [현미 녹차]의 맛과 비슷하다. 하지만 질에 있어서 만큼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목넘김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보통의 현미 녹차가 지니는 껄끄러운, 혹은 석연찮은 마무리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보인다고 해야할까? 화려한 맛은 없지만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본연의 맑은 맛이 있다. 게다가 젠마이카 그린을 마실 때 느껴지는 포만감은 마음을 행복하게 만든다.

크리스마스 오후. 자스민차를 마시고 있던 둘째 누이, 애프리콧 실론을 마시고 있던 원철군. 블랙퍼스트 블랜딩의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는 차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차의 경우 향은 뛰어 나지만 맛은 별로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개인적으로 홍차를 더 선호하긴 녹차의 다양함과 깊은 풍미에 비하자면 홍차가 열세가 확연한 것은 사실이다.

널리 알려진 진귀한 녹차가 아님에도 솜씨 좋게 우려낸 홍차의 맛을 뛰어넘는 젠마이카 그린만 봐도 그렇다. 녹차의 쉬운 접근성에 비교해보자면 홍차는 까탈스럽고 번잡하다. 어쩌면 홍차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대접할 적당한 홍차는 포션의 애플티나 스톡홀름 블랜딩이 아닐까 싶다. 연하지만 탁하지 않은, 강렬한 향 속에 숨겨진 얇은 맛에 열광하는 내 취향이 특이한 것이라면 말이다.

(내년에는 책과 루빈스타인 콜렉션에 사용 가능한 자원을 총 투입할 예정이라 비싸고 구하기 힘든 블랜딩은 내 후년까지 참아야 할 것 같다. 크리스마스 놀러 온 원철군이 선물해준 루빈스타인은 들을 수록 마음에 든다. 가끔 눈에 띄는 혹평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마음에 쏙드는 연주다)

사실 차에 대한 내 기호는 순수한 나만의 것이 아니다. 기분따라 쉽게 물들고 쉽게 질린다는 설명이 차에 대한 내 기호를 가장 간결하게 제시하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디오 대여점에 들릴 때면 문득 기억나는 옛 추억에 괴로워 하는 것처럼 차를 고르는 순간의 난 그 기호를 선물해준 그 사람을 떠올리며 심란해 한다.

스물 다섯이 되는 새해에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기호를 하나 찾아야 겠다. 새해가 일주일도 남지 않은 현시점에서 가늠해 보자면 젠마이카 그린이야말로 나만의 기호가 될 확률이 가장 높다. 하지만 어떤 것이 되었건 일주일 뒤에는 차를 고를 때마다 옛 추억에 얽매여 심란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울러 insurance security가 되는 일도 machinery로 취급 받은 일도 스물 다섯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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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에 대한 단상

2004년 7월 7일 ZERO에 다녀왔다. 난생 처음 가본 스탠딩 콘서트였던 게다가 점잖을 뺄 필요가 없는 첫번째 콘서트 였던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본 콘서트란 늘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조금은 불리한 조건의 공연이었기에…
2년동안 꼭꼭 잠궈 놓았던 마음의 빗장를 열고 가벼운 기분으로 콘서트를 즐겼던 듯 싶다. 가끔은 껍질을 벗고 마냥 즐길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껍질 속에서 질식사 할 수도 있으니까

Wake me from silence!
허리가 끊어지도록 뛰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목이 쉬도록 소리쳐 본 적이 언제였던가? 일상의 균형추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이야 말로 [폐인]이 되지 않는 첫걸음이라 세뇌 당해온 나로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의 일이었다. 리듬을 따라 움직이는 몸을 관찰하는 것도, 터져버릴 듯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을 느껴본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살아있다]란 기분에 잠겨버린 것 역시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장이 저릿할 정도로 강인한 [소리]의 홍수 속에서 고요함을 경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어느 한 순간 고막을 가득 채우는 [소리] 속에서 고요함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갖은 소란스러움이 일순간 꺼져 버린다. 무소음의 진공 속을 유영하고 있는 것처럼 한 순간 외부와 내가 완벽하게 차단된다.

그리고 이내 알 수 없는 희열이 몸을 가득 채운다. 고생스러웠던 지난 몇 달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하단 생각이 든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각으로 늘 복잡했던 머리가 깔끔하게 비워진다. 내일의 걱정도, 오늘 하지 못한 일도, 어제의 과오도 모두 머리 속을 떠난다. 지금 이 순간을 나를 지배하는 것은 드럼과 베이스가 토해내는 진짜 [소리]뿐이다.

In the Zero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감상하는 것과 콘서트를 즐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영화나 연극의 경우 무대와 관객의 거리가 재아무리 가까워도 관객의 이성은 무대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관객은 대사와 장면 하나 하나를 분석하고 연출가의 숨은 의도를 깨내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관객이 된다.

그러나 콘서트에서의 관객은 이성따위는 집에 내버려 두고 온지 오래다. 완고하다 싶을 정도로 딱딱한 나조차 음악에 몸을 내맡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부딪치는 몸들이 싫지 않다. 옆에 선 아가씨의 팔을 타고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현기증을 느낀다. 음악이 시작되기 전에는 차갑기 그지 없었는데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초고열의 발열체로 변해 버린다. 내 팔도 만만치 않은 발열량을 자랑할 텐데. 이 아가씨에게는 애당초 게임이 되지 않는다.

긴 팔에 와 닿는 허리와 가슴의 굴곡이 더 없이 관능적이다. 몸에서 발산하는 열기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Quel comment deliceux!란 클레망소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이 얼마나 짜릿한가!] 허락 없이 이리 저리 부딪치는 육신들이 전혀 싫지 않다.(사실 신체의 특정 부위가 부딪칠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일순 내가 치한이라도 된 기분에 휩쓸리지만 이내 이런 생각은 씻겨 내려간다.) 아니 생각할 겨를이 없다. 생각이란 것이, 훈련 받은 사고력이라는 것이 가장 필요하지 않은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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