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오래된 사진 속에서 젊은 내 모습을 발견한다든지, 복잡한 도심에서 몇 년 새 부쩍 나이 든 대학 동기의 모습과 조우한다든지, 삶은 다양한 방법으로 시간의 흐름을 일깨운다. 내게는 이것 말고도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몇 순간이 있는데 하나는 아끼는 책의 새 판본이 나오는 것하고, 다른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 읽던 소설에서 다른 느낌을 받을 때다.

1994년 14살 소년에게 ‘표절’은 첫사랑에 대한 지독한 몸부림으로 다가왔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주인공 에드워드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베두인족 소녀 야스미나는 내게도 첫사랑의 환상과 같았다.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복수극이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 하지만 나이를 조금 더 먹으면서는 주인공 에드워드가 빼앗겼다고 착각하는 문학적 재능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원고 냄새를 맡는 능력’에 끌렸던 것 같다

스무 살 무렵에는 복수의 도구가 되는 조작된 ‘Reprint’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끌렸으며, 복수의 대상인 니콜라가 직면한 작가라는 고된 과정에 전율했고, 그의 실제 모델이라고 밝혀진 로맹 가리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에는 니콜라나 로맹 가리나(혹은 에밀 아자르이든)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니콜라의 허영이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지 못한 비겁함의 소산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다른 형태의 쌍둥이 형제라고 느꼈던 것 같다. 몸은 자랐지만 마음은 영원히 알렉산드리아 시절에서 멈춰버린 두 소년……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무더위 속에서 피서 삼아 읽은 ‘표절’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30대 후반이 되고 나니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보인다. 야스미나는 이제는 아름다운 환상이라기보다는 희생양이 된 애처로운 단역이며, 주인공 에드워드의 사랑은 이미 야스미나가 살해되기 이전에 끝났다는 사실. 니콜라의 여성 편력에서 느끼는 애잔함. 주인공의 복수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기변명의 얄팍함. 두 사람 모두의 비겁함으로 뒤틀린 우정을 바라보는 안타까움 같은 것들 말이다.

어린 시절 나는 도서관 서가에서 ‘표절’을 빼 드는 여자에게 청혼하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의 아내도 ‘표절’을 읽었고 재미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왜 내가 이 음습한 복수극에 열광하는지, 주인공에게 깊게 감정이입을 하는지는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이제는 나도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쉽게 보기 힘든 지적 우아함이 감도는 섬세한 묘사를 읽고 있노라면 아련한 옛 소설에 대한 향수와 깊은 그리움이 밀려온다는 점이다

에코와 나

움베르토 에코가 영면에 들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내가 좋아하던 작가들은 빠른 속도로 살아있는 대가에서 작품으로만 접할 수 있는 초상이 되었고, 움베르토 에코 역시 이제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추억 속의 대가가 되었다. 그가 있었기에 내 삶이, 내 책장이 얼마나 윤택해졌는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에코와의 첫 만남은 매우 이른 시기로 기억한다. 에코의 소설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첫 영화인 ‘장미의 이름’을 통해 그를 접했던 것이리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며, 잘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넘기기 위하여 엄지에 침을 묻히는 장면을 보면서 느낀 전율이 나를 추리소설의 세계로 이끌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시간 동안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영화를 보는 동안 주머니 안에 숨겨두었던 초콜릿이 모두 녹아 바지를 버렸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렇게 그와의 교류는 시작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큰 누이가 대학에 들어간 1992년에 책으로 만난 ‘푸코의 추’는 내 삶의 혁명이었다. 성당기사단에 빠진 것도 그때부터였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라는 에코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시기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주전자 뚜껑이 열린다’는 표현부터, 이제는 골동품이 되어버려 어느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도서색인카드의 매력에 빠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장난스러운 지적 유희가 진짜 음모가 되었을 때의 전율. 그리고 장난을 더는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공포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리고 까소봉과 벨보, 디오탈레비와 아불라피아가 십 대 소년의 마음속에 얼마나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도…

‘전날의 섬’은 또 어떤가? 좌초된 플랑드르 평저선에 살아남은 한 인물이 그려내는 바로크 시대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해상시계와 경도의 확정은 이미 잘 알려진 과학적 소재지만, 에코가 그려낸 바로크적 인식을 앞으로 누가 흉내 낼 수 있을까? 루이 치세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분위기는 비슷한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에 비해 얼마나 세련되고 섬세한지… ‘바우돌리노’는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푸코의 추에서 다루었던 팩트 소설을 한 단계 뛰어넘어 한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려낸 역사는 또 얼마나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신비한 불꽃의 로아나 여왕’은 스물여섯 여행길에 읽은 에코의 자전적 소설이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의문을 품었던 세계대전 말기의 이탈리아- 아니 에코의 추억-를 소설을 통해 엿보는 즐거움은 은밀함을 넘어서 작가 자신과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과거 그의 소설을 읽는 동안 유령처럼 배회하는 그림자들의 실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던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 역시 문학적 사춘기와 결별할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팩션이라는 장르가 새롭게 명명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에코에 비하면 한참이나 격이 떨어지는 팩트 소설을 보면서 얼마나 조소를 했던가? ‘프라하의 묘지’를 마지막으로 우리 세대는 이처럼 비범한 ‘지적 유희’ 또는 ‘역사를 가지고 치는 장난’을 다시 만나지 못하리란 예감이 든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파리 마치에 실린 에코의 인터뷰는 손만 뻗으면 닿는 위치에 있다. 그와 함께한 삼십 년 을 추억하며 다시 한 번 위대한 기호학자보다는 소설가로 친숙한 그를 잠시 기려야겠다. Requiescat In Pace!

로마의 일인자

헌책방에서나 구할 수 있고,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이 소설이 1993년 첫 출간 이후 22년만에 재출판되었다. 하지만 아내가 보내준 새 책의 번역을 보고 있자니 너무 정직한 번역이라 그리 끌리지는 않는다. 이벤트로 나누어주는 문진은 정말 갖고 싶은데…

Original

Two encounters with women in the same day unnerved Gaius Marius more than the prospect of fighting an enemy army ten times bigger than his own

One encounter was his first meeting with his intended bride and her mother: the other was his last meeting with his present wife.

황종호, 유명호 공저의 번역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는, 아군 병력의 10배도 넘는 적군과 대적하는 것보다 하루에 두 여자를 만나야 된다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그는 새로 맞이하기로 마음먹은 신부와 그 신부의 어머니와 첫 대면을 해야하고, 그 다음에는 현재의 아내인 그라니아와의 마지막 만남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변역

여자들과의 대면을 같은 날 두 번 치러야 한다는 사실은, 아군보다 열 배 더 많은 적과의 전투를 앞둔 것보다 더 긴장되는 일이었다. 첫번째 대면은 미래의 신부 그리고 장모와의 첫 만남이었고, 두번째 대면은 지금 아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