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클레어

내 삶의 첫 첩보물은 지금은 본 시리즈로 더 많이 알려진 로버트 러들럼의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그 시절 러들럼의 소설에는 지금은 기본이 되어버린 인터넷과 인공위성을 통한 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파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이며, 생존의 필수요건은 뜀박질과 한결같은 조심성이다. NOC(Non Official Cover) 요원은 죽음에 한발 걸친 존재이며, 익명성을 잃은 현장 요원에게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뿐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할 법한 악령인 ‘진’을 무기화하려는 소련(러시아가 아니다)의 계획의 분쇄하는 이야기를 담은『디클레어』를 읽으며 오래된 첩보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디클레어』가 악령과 신비가 존재하는 환상 소설이면서도 정통 첩보물의 미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당국에 의해 키워진 옥스퍼드 출신 학생이 이중첩자가 되고, 제2차세계대전 중 현장요원이 되었으며, 대전 중의 파리와 베를린을 거쳐 최후에는 아라라트산 정상에서 오랜 싸움을 마무리 짓는 다소 식상한 전개일 수도 있으나, 이야기의 흐름을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오랫동안 기대했을 정도로 훌륭하다. 주인공인 헤일은 MI6와 CIA를 초토화시킨 킴 필비와 케임브리지 5인조와 대칭적인 역할을 맡는 동시에 말더듬이 필비의 목격자이자 대적자가 된다.  하지만 이런 플롯보다 더 뛰어난 부분은 전형적임에도 연민과 동조를 멈출 수 없는 인물들의 입체성이다. 선택의 순간과 그 순간들이 만들어 낸 삶의 궤적은 빼어난 사실성과 별개로 기이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작가인 팀 파워즈를 처음 접한 것은 스팀펑크 물인 『아누비스의 문』을 통해서였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디즈니의 프랜차이즈인 ‘캐러비안 해적 – 낯선 조류’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며 영화를 보는 듯한 세밀한 서사에 놀랐던 부분은  작가의 특이한 이력으로 설명이 충분할 것 같다. 서사뿐만 아니라 배경을 선택하고 묘사하는 능력 또한 훌륭하다. C와 만나는 화이트홀,  이중첩자가 되는 순간의 더 시티,  현장 요원으로 첫발을 디딘 파리,  베를린에서의 기묘한 대치, 15년 만의 활성화와 런던에서의 접선, 레바논 내전으로 사라져 버려 이제는 사진으로밖에 남지 않는 레반트의 파리 베이루트의 아름다움,  신비한 아라라트산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미션 임파셔블 못지  않고, 상황 묘사의 섬세함은 러들럼과 르카레의 사이에 존재한다.

사실 이 책을 포함해 팀 파워즈는 번역서는 모두 오래전부터 절판 상태다. 그럼에도 절판된 책에 대한 리뷰를 쓰는 이유는 꼭 다시 읽고 싶은 책이고, 아내의 다음 소설로 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