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프트 이야기

가끔은 마음속을 맴도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글을 남기기 어려운 책이 존재한다. ‘회사원’이라는 삶의 다음 페이지가 시작되기 전 이십 대의 마지막 울림을 준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 그랬고, 지금은 『델프트 이야기』가 그렇다. 두 소설 모두 수잔 브리랜드라는 우리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작가의 작품이다. 아내와 나는 딸아이를 재우고 소비뇽 블랑을 마시며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꽤 많은데 그때 워싱턴 DC에 가게 된다면 필립스 갤러리에 있는 르누아르의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을 몇 시간이고 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그제야 아내에게 수잔 브리랜드의 책을 제대로 소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골집 책 창고에서 먼지를 먹고, 중고 서점을 섭렵해서 겨우 국내에 번역된 모든 책을 서재에 넣었다.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이 동명의 그림과 그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델프트 이야기』는 페르메이르의 그림과-물론 이 그림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물이다- 그 그림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현대에서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이어지는 8편에 이르는 단편의 주제는 ‘히아신스 블루 색 옷을 입은 소녀’라는 페르메이르의 그림에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아름다움이 가지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술과 아름다움을 정의하기 위한 교과서적인 접근이라 폄훼할 수 있으나 실제 소설의 문장은 그보다 더 아름답고 각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더 생생하고 진한 호소력을 지닌다. 더욱이 맨 마지막 두 개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화가 페르메이르 자신과 그의 딸 마그달레나다.

『델프트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페르메이르라는 걸출한 화가지만 그만큼 다른 중요한 축은 예술이 삶에 미치는 영향이다. 우리가 아는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 이 그림은 갈망과 가족의 삶이 담긴 것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아침 햇살’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존재가, 누구에게는 첫사랑이, 어느 소녀에게는 친구이자 숨구멍이 된다. 아내와 나에게도 아름다움은 그런 존재다. 유리 건물에 갇혀 오랜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게 일은 흘러 지나는 것이고 오직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운 딸만이 삶의 의미가 된다.

젊은 시절 페르메이르와의 만남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유명한 소설 『진주 귀걸이 한 소녀』로 시작되었다.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색채와 빛을 지닌 그림과 페르메이르는 그렇게 내 머리에 각인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칼렛 요한슨 주연으로 영화화되면서 모나리자만큼 유명한 그림이 되었다. 소설과 그림이 너무 유명해지면서 페르메이르는 내 삶에서 되레 멀어졌다. 페르메이르는 그의 고단한 삶과 무관하게 17세기 네덜란드 해상 무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었고, 델프트 역시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풍으로 인식되었다.

페르메이르가 다시 내 삶에 등장한 것은 2020년 뉴욕 출장 끝에 방문한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의 한 방에서였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브리튼을 채운 장대한 컨스터블의 풍경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아담한 풍경화 좌우에 걸러진 페르메이르의 두 점의 작품(‘장교와 웃는 소녀’, ‘여주인과 하녀’)을 바라보는 동안 지금껏 내가 페르메이르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오후 메트에서는 ‘잠이 든 여인’, ‘물 항아리를 든 젊은 여인’과 ‘젊은 여인의 초상’을 봤다. 그림을 감상하는 동안 얇은 붓 터치가, 붓질 하나하나가 실수 없이 쌓여 만들어진 형태와 그 속에 담긴 빛을 포착하는 과정 속에 문장으로 담아내기 버거운 고통과 고통을 담금질한 시간이 화가에게 필요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페르메이르는 다시 내 삶에 찾아왔다.

올해는 평생 가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암스테르담에 가게 되었다. 딸이 가보고 싶어 했던 안네 프랑크 하우스와 반 고흐 미술관까지 일정을 채우기는 쉬웠다. 레익스(Rijks,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무엇을 감상해야 할지 고민하는 동안 아내는 짐을 챙기는 대신 『델프트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그제야 암스테르담은 낯선 여행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형태와 의미를 가진 장소가 되었다. 나치 치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 소녀의 삶을, 운하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과 홍수를 읽고 만나는 암스테르담은 전혀 다른 의미의 도시가 된다. 레익스에서는 ‘우유 따르는 하녀’, ‘연애 편지’, “델프트의 집풍경’, ‘편지를 읽는 여인’을 만났다. 몸이 아픈 딸아이 때문에 ‘델프트의 집풍경’만 여유를 가지고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붉은 베네치아 덧창과 쪼그려 앉은 아이들, 섬세한 붉은 벽돌을 더 눈에 담지 못하고 나오는 걸음은 아쉬움으로 미적거렸다.

언제인가 다시 저지대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는 브뤼헤와 겐트, 헤이그를 가는 여정을 계획해야겠다. 영화로만 보던 브뤼헤의 운하를 연결한 다리를 걷고, 겐트의 재단화를 보고, 헤이그에서는 마우리츠호이스에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델프트의 조망’을 보리라. 세상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이 많고, 봐야 할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