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가끔은 예상해도 눈으로 확인할 때야 확신이 드는 순간이 있다. 아내와 서재를 결혼시켰을 때가 그랬다. 아내와 내가 가진 책 가운데 골즈워디라는 공통분모가 확연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누구 책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숙제를 어떻게 끝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딸아이 키가 아내와 비슷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 수도, 골즈워디의 책들이 갑작스레 많이 번역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골즈워디는 로마사 그것도 전쟁사의 전문가이다. 그런 작가가 쓴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는 어떨까 하는 의문으로 시작한 책을 다 읽기까지는 여섯 달이 걸렸다. 회사 때문에 여력이 부족했노라 변명을 해보지만, 이전에 읽었던 다른 저작들에 비해 조심스럽고 주저하는 망설임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아서 그런 부분도 존재한다.

플루타르크의 『비교 열전(영웅전)』에서 필리포스는 독립된 인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포키온, 데모스테네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애꾸눈 왕’일 뿐이다. 영웅의 고난을 강제하는 강대한 적이나 영웅적인 아들을 위한 조연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라. 페르시아를 제압한 마케도니아 ‘전쟁 기계’를 설계하고 육성한 공로는 무시되고, 말년의 왕은 헤픈 결혼으로 영웅의 삶을 망칠 뻔한 주정뱅이로 그려진다.

골즈워디는 많지 않은 기록을 토대로 왕위를 쟁취할 가능성이 낮았던 인질로 테베에 보내졌던 왕자가 어떻게 왕이 되고, 테베와 아테네라는 두 강국 사이에서 어떻게 작은 왕국을 유지하였으며, 종국에는 승리를 통해 작은 왕국이 지역 강국으로,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리스 전체를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되었는지를 서술한다. 한 번의 패배로도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던 사냥꾼과 농부들의 작은 군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을 축적하고 조직을 갖추어 나갔으며 종국에는 페르시아를 무찌른 기병과 팔랑크스로 역사에 기록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국내에 번역된 책 가운데 필리포스를 위해 이 정도로 노력을 할애한 책은 없었다고 단언해도 될 정도로 작가가 그려내는 필립포스는 정교하고 생생하다.

많은 이야기 속의 알렉산드로스는 부케팔로스를 다룬 명민한 젊은 소년으로 시작한다. 부친의 권위에 반항하는 젊지만 훌륭한 지휘력을 지닌 청년이 되고, 부친의 계획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원정에 떠나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를 제압한다. 그리스가 알고 있던 세계의 끝까지 정복한 영광과 명예를 좇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의 영웅으로 말이다.

골즈워디는 이런 알렉산드로스 像에 적극적인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새로운 시선을 더한다. 전제정의 왕이자 음모가 일상인 아르게아스 왕가의 후계자로 집행하는 숙청과 조직적인 살해와 약탈, 힘든 행군과 요새 공략으로 점철된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의 군사작전을 빼놓지 않는다. 작가가 그려내는 알렉산드로스는 플루타르크가 그린 젊지만 산뜻한 영웅과 거리가 있다. 골즈워디가 그려내는 알렉산드로스는 한 번 구르기 시작한 수레바퀴를 멈출 방법을 찾지 못한 위험한 사내다. 영웅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평범한, 천재적이나 항상 천재적일 수는 없는 모순 형용의 삶이 조심스럽게 그려낸 영웅의 모습이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는 그 유명한 이수스 전투를 묘사한 모자이크가 있다. 전차를 타고 도망가는 다리우스 3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대비되는 기계적인 차분함이 담긴 알렉산드로스는 오랜 시간을 봐도 질리지 않는다. 폼페이의 폐허에서 발견한 이 모자이크는 골즈워디가 그려낸 알렉산드로스와 가장 비슷한 느낌이다. 실제로는 작은 키에 단단하지만 금발에 ‘오드 아이’를 가졌다고 전해지지만 말이다.

서재 한편에는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기』와 디오코도이(후계자들의 전쟁)를 다룬『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이 나란히 꽂혀 있다. 아리아노스가 이미 오래전 영웅이 된 대왕의 행적을 로마의 경험으로 따라간다면, 후자는 알렉산드로스 4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발굴로 시작하여 제국의 유산을 갖기 위해 싸우는 ‘자칭’ 후계자들의 전쟁을 그려낸다. 골즈워디의 이 책은 두 책 사이의 빈틈을 메우기에 최적의 선택이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

만화책 ‘히스토리에’가 나오지 않았다면 플루타르크의 ‘비교 열전’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짝으로 등장하는 에우메네스가 널리 알려졌을 것 같지는 않다. 배타적인 마케도니아 제국의 권력 구조에서 그리스인 서기에서 출발해 기병대장을 거쳐 장군이 된 사람. 조금 더 운명의 여신에게 총애를 받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다면 조각나는 제국을 이어 붙었을 수도 있었을 사람. 그리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풍운아’라는 표현에 딱 적합한 인물. 그 시대 수많은 다른 인물들처럼 허상을 좇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불운한 천재. 물론 ‘히스토리에’는 이제 겨우 아홉 권이 나왔고, 이 속도로 가늠해보자면 20년쯤 지나야 에우메네스의  죽음에 이르게 될 것 같다.Untitled

사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눈물’은 에우메네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쪼개진 마케도니아 제국의 분열상을 묘사한 책이다. 하지만 불과 십여 년 동안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이 어떻게 제국을 갈라먹었는지, 또 그 과정에서 덧없이 사라진 인물들과 하루아침에 폐기된 제국의 유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 극적 상황에 놀랄 수밖에 없다. 배신과 책략이 난무한다는 점에서 ‘쌍전’은 우스운 정도이고, 이 거대한 내전은 아수라장은 그 격렬함의 근원이 신념이 아닌 포장되지 않은 날 것의 권력욕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의 다른 내전과 궤를 달리한다.

저자는 알렉산드로스의 급사로 시작해 왕위를 가졌지만 통치에서 절처하게 배제당한 소년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거대한 내전을 마무리한다. 죽음 이후에나 주어진 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무덤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훌륭한 점은 저자가 ‘비교 열전’ 곳곳에 흩어진 다양한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에우메네스의 삶을 서술의 시간 축으로 삼아 마케도니아 본토, 그리스, 소아시아, 아시아, 이집트의 공간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갈등을 묘사하는 실력이 압도적이다.

‘히스토리에’ 덕분에 아마도 우리는 만화가의 상상력으로 복원된 에우메네스의 ‘왕궁일지’를 읽게 될지도 모른다. 이민족- 또는 열등한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배척받는 에우메네스의 육성으로 그의 추구했던 진짜 목적을 듣게 될지도, 어쩌면 알렉산드로스의 비밀 유언이 이야기에 가미될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던 앞으로 20년 동안 작가가 머리를 싸매고 이야기를 그려나갈 동안 우리는 먼저 이 책을 읽으며 나름의 상상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맹목’의 정영목 선생의 번역은 훌륭하고,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원정, 인도 원정을 위해서 후방에 남겨 둔 고집 센 노인들이 어떤 실력을 발휘해서 그의 제국을 산산조각냈는지를 음미해보는 재미도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