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북컬렉터들이 바라는 이상이 있다면 -물론 엄청난 비용이 소모되는 인큐내뷸러나 아메리카나 같은 것을 제외하고- 최상의 것은 저자 자신이 소유했던 수택본이나 원고를 손에 넣는 것이고 다음은 초판에 담긴 서명본을 얻는 것이다. 다행히 이런 기이한 취미는 우리네 문화와는 너무 이질적이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지만 내 손에도 우연하게 저자 서명본 초판이 놓였던 적이 있다.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들린 워터스톤즈의 낭독회에서 본 로버트 해리스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빼면 마른 체격의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주름진 얼굴을 가진 가진 이 작가를 좋아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가 내가 흥미롭게 본 <이니그마>와 <파더랜드>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그가 낭독하는 책을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키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새로운 시대극이라는 광고 문구보다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훌쩍 넘긴 어느 페이지에서 발견한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이었다. 마치 현대의 리포터가 현장을 취재한 듯 펼쳐지는 공화정 로마를 상징하는 부조리와 치열한 경쟁의 장을 다룬 한 막 앞에서 작가의 특별한 능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화정 로마를 다룬 소설의 백미는 항상 콜린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 시리즈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로버트 해리스의 『키케로 3부작』은 다른 의미의 백미가 될 것이 확실하다. 맥컬러우의 『로마의 일인자』가 캐릭터와 섬세한 묘사가 만들어 내는 인간의 본성의 치열한 장을 설명하고 있다면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은 정치 스릴러에 가깝다. 맥컬러우의 로마가 인간이기에 욕망하는 수많은 탐욕과 야망이 만들어 내는 향연이라면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는 정치라는 경쟁의 장에 던져진 투쟁에 보다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이 경기장에서 키케로만큼이나 다양한 적을 가졌고, 험한 고초를 겪은 인물은 없으리라.
『임페리움』은 키케로의 삶의 단계를 세기의 재판으로 불리는 베레스에 대한 기소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정치인 키레로의 본격적인 투쟁이 펼쳐질 무대를 마련한 집정관 당선과 함께 마무리 짓는다. 그 사이 몇년 동안 독자는 아무런 정치적 입지를 갖지 못한 이 지방 출신의 이 로마인이 어떻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고, 포퓰라리스의 이익을 대변자였다가 얼마나 극적으로 옵티마테스로 변신을 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키케로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었다고 이 책은 규명하지 않지만 최소한『임페리움』 안에서 저자는 그 역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 한 사람의 로마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세대가 내전을 통해 소멸한 다음 로마의 주인이 된 지방출신의 새로운 로마인들이 만들어 낸 허울뿐인 공화국의 주인공들과 그가 얼마만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를 이야기 이곳 저곳에 뿌려두고 있다.
물론 이야기는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카탈리나 탄핵을 통해 보여줄 키케로의 활약과 공화국의 프린켑스로써 삼두에 맞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그의 정치적 역경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 그의 신념과 용기가 어떻게 드러날지는 아직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이제 겨우 기나긴 이야기의 서두만 풀어놓고 있음에도 이 소설의 재미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M_P.S.|less..|하지만, 번역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문장을 옮기는 시도란 얼마나 무모한 용기인가? 그리고 이 번역자의 후기마다 끊이지 않는 386 타령은 이제 들어주기조차 지겹다. 무의미한 타령을 늘어놓은 여유가 있으면 지명과 관제, 소설이 묘사하는 시대에 대한 이해력이나 키웠으면 좋겠다.
_M#]
가디언에 실린 로버트 해리스와의 인터뷰는 작가의 의도를 읽는 가장 좋은 참고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실 그가 주목한 부분은 대필작가와 의뢰인 사이의 관계였다. 의뢰인조차 제대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어떤 사실을 이끌어내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이야기로 옮기는 사람. 진실을 끌어내는 것을 임무로 삼지만 결코 진짜배기 진실에 다가설 수 없는 한계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직업. 사람들이 읽고자 하는 거짓을 진실에 가깝게 보이도록 포장하는 전문가. 비록 토니 블레어가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서 미국조차 알지 못하는 진실을 옹호했던 부시의 가장 훌륭한 대필작가라는 조소가 덧붙긴 했지만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이런 변화를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변화의 양상을 정확하게 집어내지 못하면 99년에 출간된 이 소설의 의미를 정확하게 집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의 거대한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20년의 연구로 세계 대전에서의 스탈린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전쟁의 사상자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스탈린의 독재로 죽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99년 시점에서 이 모든 사실은 조금 덜 불명확했으며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러시아는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었으며 두마에서 공산당은 어느 사이엔가 유력한 지위를 되찾았다. 차라리 가난하고 헐벗었을 만 정 마음 편했던 옛날에 대한 향수 역시 무시 못할 정도로 강했다. 정치는 불안했고, 엘친의 임기는 끝나가고 있었으며 ,구제국의 몰락이래 9.11 사태가 벌어지기 이전 가장 테러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도시는 다름 아닌 모스크바였다. 이 소설이 쓰이고 출간된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