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늑대

어린 시절과 다르게 중년이 된 지금의 나에게 독서가 주는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어린 시절의 독서가 새로운 세상과 지식을 열어주는 통로였다면, 지금의 독서는 물론 그런 기능도 있기는 하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거나 파편화된 기억을 묶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역사란 부제가 달린 『바다의 늑대』 역시 마찬가지다.

이십 대의 나는 영국을 여행하던 중 레딩에서 사우샘프턴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던 적이 있다. 기차는 잠시 윈체스터에 정차했고, 부지불식간에 기차에서 내린 나는 정복왕 윌리엄 이전 시대 에식스 왕국과 초기 잉글랜드 왕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의 한적함에 매료되었다. 앨프레드 대왕이라 불리는 바이킹으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왕을 기리는 도시를 걷는 동안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서 읽었던 데인겔트와 데인법 시행지역, 위대한 크누트 대제와 앨프레드의 관계에 대해서 잠시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이내 영국답지 않은 찬란한 햇살과 가을꽃 향기에 이내 모든 것을  털어버렸다.

사실 이것만이 아니다. 테러호가 사라진 캐나다 배핀섬 인근에서 발견된 바이킹의 유적, 비잔티움 황위에 충성을 다한 바랑기안이라는 바이킹 근위대의 존재,  시칠리아 노르만 왕조의 유적, 슬라브족과 바이킹 혼혈로 알려진 키예프의 대공들과 루스의 근원,  드네르프 강 하류에 위치한 크림반도와 하자르족의 멸망. 중년에 이르기까지 나는 책과 여행을 통해 수많은 바이킹과 만났지만, 단편적인 정보를 엮어낸 계기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바이킹의 발호 같은 지극히 대서양과 지중해 관점의 지도를 통해 습득한 편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바다의 늑대』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머릿속에 흩어진 바이킹의 정보를 완결된 흐름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주기 때문이다.

『바다의 늑대』는 아쉽게도 역사의 통찰력이 담긴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이킹이라는 불가해한 역사의 족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돕는 친절한 책이다. 넷플릭스 드라마인 ‘바이킹스’나 ‘라스트 킹덤’을  보고나서 각색과 역사적 사실을 조금 더 파헤쳐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책. 아울러 고백하자면 난 지금까지 동유럽의 바이킹은 비잔티움을 통과해 흑해로 진출했다고 생각했다. 롱십을 타고 북해에서 강을 따라 흑해와 카스피해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금껏 이해하지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좀 충격적이다.

 

미친 포로원정대

  세상에 가장 결합하기 힘든 문학 장르가 있다면 그것은 포로 경험을 다룬 전쟁 문학과 등반기를 다룬 여행 문학이 결합하는 경우일 것이다. 자유가 극도로 억압된 포로 상태와 자연과의 극한투쟁 상태인 등반 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가능성은 존재한다. 필사의 탈출을 위해서 험난한 산악 루트를 통과하는 경우라면 두 장르가 결합할 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경우는 경험에 기반한 에세이보다는 허구인 소설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바로 ‘미친 포로원정대’가 바로 그것이다.

 ’미친 포로원정대’는 동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 억류된 이탈리아 민간인들의 포로로서의 삶을 다룬 훌륭한 전쟁문학인 동시에 케냐산을 등반하는 과정을 다룬 등반기다. 자유를 잃은 상태에서 기약 없는 전쟁의 끝을  기다리면서 같은 소설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고,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지루한 삶 속에서 발견한 설산과 그 산을 등반하겠다는 황당한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와 실행 과정. 숨 막힐 정도의 긴장감은 아니지만, 이들의 등반은.

 사실 여기까지가 2015년 10월에 쓴 글이다. 정확하게 4년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쓰던 글을 마무리하려 보니 무슨 문장을 쓰려고 했는지, 어떤 내용의 책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시시포스에게나 어울릴 기나긴 전쟁의 끝을 자유를 억압당한 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눈에 띈 설산, 가장 필수적인 등반 장비도, 등정 코스에 대한 정보도 없이 그저 산에 오른 사람들이 마주친 경이와 험난함. 성공의 뿌듯함과 다시 수용소로의 귀환. 이 책을 요약하는 문장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들이 케냐산에서 겪은 하루하루가 예사롭지 않다. 전쟁이 끝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일상을 살게 되었을지라도 이들은 항상 케냐산에서 겪은 하루를 기억하며 진정한 친구로 남게 되지 않았을까? 고난과 그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 평생 나누고 기억에 살을 붙이며 그렇게 나이 들었을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이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마흔을 두 달쯤 남긴 지금에야 이들이 하산길, 정확하게는 수용소로 돌아가는 길에 느꼈던 자유로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몸이야 다시 수용소라는 굴레에 다시 얽매이겠지만, 한 번 영혼에 새겨진 성취감과 자연의 경이, 고양감은 수용소 따위로 다시는 묶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덩케르크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속죄’에는 어린 소녀에 의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끌려와 전쟁에 종군하게 된 로비 터너(제임스 맥어보이役)란 인물이 등장한다. 프랑스-영국원정대의 참담한 패배와 함께 벨기에 전선에서 파드칼레까지 후퇴하는 고난의 길, 그리고 휴양도시 덩케르크에서 탈출선을 기다리며 혼수상태 빠져가는 장면이 내가 전쟁사가 아닌 문학과 영화로 처음 접한 덩케르크 후퇴 작전이었다.

 만약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였다면 ‘로비 터너’ 같은 인물 몇을 중심으로 덩케르크의 충격과 공포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후위를 지키다가 전멸한 소총연대 병사들과 연안여객선 지붕 위에서 독일 전투기를 향해 경기관총으로 응사하는 외로운 수병들. 의연한 모습으로 최악의 전쟁터를 향해 떠나는 항해가들을 내세워서 말이다.

스필버그와 달리 놀란은 덩케르크 후퇴 작전 속에서 그의 출세작인 ‘메멘토’를 복기하게 할 법한 연출로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을 이용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파드칼레에서 해협 너머 고향까지 모든 중장비를 잃고 버려진 군인들의 일주일과 도싯같은 항구 도시에서 덩케르크의 군인들을 구하기 위한 민간 항해사들의 하루, 그리고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탄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 세 개의 각기 다른 시간 축은 덩케르크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결국에는 만나고 적층되며 거대한 서사로 이어진다.

사실 놀란의 연출에서 더 좋았던 점은 왜 히틀러는 릴에서 독일군을 정지시켰는지, 덩케르크 후퇴의 성공이 핼리팩스같은 유화론자와 처칠같은 강경론자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막고, 결국 영국이 홀로 유럽에서 독일 상대로 투쟁하게 되었는가 따위의 거대담론에 매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거대한 규모의 영화에서 공중전과 말미에 등장하는 몇몇 제외하면 적군인 독일군은 생명을 위협하는 실체라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귀향을 가로막는 존재론적 개념에 가깝고, 이야기 초반 3기의 스핏파이어 편대와 소형 보트가 가로지르는 영불해협은 오히려 적막하다. – 실제로 후퇴 작전이 있었던 시기에는 독일 폭격기의 공격과 해협을 바쁘게 오가는 배들로 혼란 상태였다고 한다-

‘핑키 블라인더스’의 킬리언 머피는 다시 한번 전쟁터에서 정신이 망가진 장교로 등장하고, 스핏파이어 조종사인 톰 하디는 파일럿 고글에 가려진 눈동자만으로 최선의 연기를 선보인다. 왕년의 멋진 불륜남 전문배우였던 마크 라이런스는 말수는 적지만 단호한 캐빈보트 선장으로 분한다. 무엇보다 덩케르크 부두를 지휘하는 해군 중령 역할을 맡은 케네스 브로너의 스틱스강을 건너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인셉션 이후 오랜만에 마음에 들었던 놀란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