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조한 마음

방학 첫 주를 맞이하여 아내와 딸은 제주 여행을 떠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휴가가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서울에 남았다. 아내와 딸이 여행을 떠난 동안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다 읽기로 마음속으로 굳건하게 맹세했다. 사실  『초조한 마음』을 서재에 들인 것은 거의 십 년 전의 일이다. 내가 먼저 책장을 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내가 나보다 먼저 읽기 시작했고, 아내는  『초조한 마음』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내는 애서가가 아닌 서재관리인이 된 나에게 해마다 『초조한 마음』을 읽을 것을 권했다. 더 이상 예술로서의 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나에게 계기가 될 것이라며 아내는 권했고, 또 권했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다. 첫 3년 동안의 나는 회사의 특이한 구조에 대해 동료들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번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와 보내는 행복한 시간에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두 번째 3년 동안의 나는 유배지에서 비루함을 곱씹고 있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세 번째 3년 동안의 나는 아이를 매일 볼 수 없는 춘천 근무에 힘겨워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자꾸 처음부터 다시 읽는 책이 너무 많았고, 서울과 춘천, 출장지 사잇길에서 시간이 덧없이 사라졌다. 네 번째 4년 동안의 나는 신문에 검색하면 나오는 실패한 사업에 내 삶을 모두 던져넣었다.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책 대신에 연구자료를 읽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모델링을 하고,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일에 매달리는 삶의 덧없음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잊으려고 책 대신 일을 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실패와 함께 다시 유배지를 택했다. 다시 온 유배지에서 나는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간섭도 없고, 책임도 대수롭지 않은 유배지에서 무엇을 읽을지 계획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젊은 시절의 나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애서가로서 느꼈던 지난 15년 간의 ‘초조한’ 마음을 요약하면 위와 같으리라.

다시 『초조한 마음』으로 돌아가자면 이제 겨우 절반 넘게 책을 읽었다. 하지만 절반을 넘은 순간 내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하다. 무슨 일이 남아 있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책장을 넘기기 어렵다. 아내에게 왜 이 책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지, 삶을 갈아 넣었던 일의 실패로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아내가 부탁한 유일한 일이 왜 이 책을 읽는 것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젊음이 무엇인지, 나약함이 무엇인지, 연민이 무엇인지, 초조함이 무엇인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나약함이 그리스 신화의 ‘Hubris’와 같은 맥락이 될 수 있는지, 이 이야기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츠바이크의 글을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아직 책장을 다 넘기지 못했음에도 앞으로 평생 가장 좋아하는 츠바이크의 소설이 될 것임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을 내 눈에 고인 눈물이 증명해 주리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고통으로 넘기지 못했던 책장을 끝까지 넘겼다. 절반쯤 읽었을 때 느꼈던 예감은 비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예감이 무슨 소용일까?

사실 츠바이크는 예리한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문장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작가는 아니다.  다만 기껍게도 『초조한 마음』은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덕분에 다른 소설에 비해 되려 널리 알려진 편이다. 영화가 소설의 액자식 얼개와 흐름의 일부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과 다르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장면이 아닌 문장을 음미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초조한 마음에 대한 집대성이다. 누구나 겪어 보았을 법한 연민, 동정, 철 없는 자부심,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마음속 작은 속삭임에 따랐기에 커지는 사건. 그 가운데 느끼는 잠깐의 평화, 자기부정과 학대,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분노. 비겁함, 그리고 사람을 막막하게 만드는 슬픔과 절대 속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이 소설을 주인공 안톤 호프밀러 소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나는 조금 더 실수를 잘 인정하고, 타인의 실수에 관대하며,  초조한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중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년이 되었기에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과 행동을 더 잘 이해하고, 이 소설의 가치와 슬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소설 속 주인공 호프밀러이다. 사건과 배경은 좀 달라질지 몰라도 우리가 초조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The Portrait of an Average Woman)

대혁명 시기의 프랑스는 공화정 로마와 명말 청초의 중국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다. 이 시기 대한 책이나 유물들은, 심지어 소설이라도 나를 유쾌하게 만들곤 한다. 그것이 어떤 입장에서 쓰였는지는 나로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 시대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 혹은 발견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재작년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빅토리아 앨버트에서 부르봉가의 도핀과 도피네의 그림이 그려진 도기 역시 이런 발견의 연장선상에 있다. 루이 15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한 채 죽은 비운의 인물, 그의 세 아들은 왕이 되었지만 그대에서 부르봉가의 지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혹 그가 루이 15세만큼 오래 살았다면 프랑스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M_ more.. | less.. | 사실 역사는 이 인물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퐁파두르 부인과 염문을
뿌린 루이 15세의 호색함과 다르게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했고(왕실 결혼에서는 한 무더기의 아이들이 이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예로 본다), 전쟁에 관심을 많았으면서도 경건하고도 단호한 열정을 지녔던 선량한 남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부르봉가의 유일한 직계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부왕과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왕이 되었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착하지만 굼뜬 남자였던 루이 16세 대신 그가 혁명의 전야에 왕으로 있었다면 파리의 바리케이드는 군사력에 의해 단호하게 분쇄되지 않았을까? 루이 15세 시대의 방만한 재정이 일거에 회복되지는 않았겠지만,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합스부르크와의 결혼을 통해 얻게 된 이점을 통해 보다 유연한 외교정책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혁명이 그의 아들들에게 선량한 품성과 양심을 앗아간 대가로 옹졸함과 파렴치함을 선물한 비극적인 사태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_M#]

사용자 삽입 이미지불행하게도 누구나 이런 가정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안다. 유능한 역사가라면 실재하지 않는 대안에 목을 매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통속적인 역사 소설가들마저 로로코의 여왕에 비하자면 담백하기 그지없는 이 인물에 끌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아는 역사란 트리아농의 ‘오스트리아 여자’로 불리는 앙투아네트가 역사에 남겨놓은 이런저런 흔적들뿐이다. 수두자국 투성이 남자들이 왕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동안 단호하게 깨어나 철의 여인이 되었던 한 여성의 삶이 거칠게 농락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이란 없다.

프레이저와 다르게 츠바이크의 문장은 대담하고 보다 직설적이다. 전기 소설이 그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보여주었다는 평답게 츠바이크의 분석은 섬세함과 정연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츠바이크는 앙투아네트를 로로코의 여왕이라는 허영심 많고 세상물정 모르는 프랑스의 왕비로 바라보기보다는 -그에게 목걸이 사건은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뒤마의 소설에서 다루어진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아니다- 두 왕가가 7년 전쟁을 통해 확인한 외교적 결론을 확인하기 위한 동맹의 증명으로 낯선 나라에 던져진 철없는 소녀가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이는 과정을 중심으로 조망하고 있다.

한 소녀의 내면적 성장과 고통. 힘겹게 얻은 평화. 생명을 건 투쟁이라는 소재 측면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여왕』과 비슷하나 묘사와 분석의 강렬함은 이를 웃돈다. 사실 이 책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어린 시절 본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 속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얗게 센 머리에 검은 숄을 두른 채 재판정에 나와 남편과 자신의 아들이 지닌 정당한 권위와 권력을 당당하게 논변하던 급격하게 노인이 되어버린 한 여자의 이미지가 다비드가 그린 너무나도 모욕적인 스케치에 오버랩 되면서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 혁명에 대한 내 관점을 압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닌 권리를 지키고자, 또 남편을 지키기 위해, 아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벌인 장엄한 사투가 비루하고 졸렬한 스캔들에 모욕당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츠바이크의 『마리 앙뜨와네트:베르사유의 장미』는 이 물음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제시한다. 모욕당한 어미의 편지와 죽음을 앞둔 여인의 마지막 사랑 고백 앞에서 츠바이크는 전례 없는 어조로 그녀를 변호하고, 그녀를 위해 그만의 장엄한 묘석을 새긴다. 그녀의 남편과 죽음조차 확인하지 못한 아들의 왕좌를 대신 차지한 시동생들이 기요틴에 목이 잘리고 스케치와 그림만으로 회자되는 그녀의 차가운 주검을 콘크리트 묘지 아래 버려두는 동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