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아침

날카롭지만 쓰디쓰고, 격렬하면서 고통스런 인식이 아침 나절의 나를 휘감았다. 운명에 투덜거리는 것이 멍청함의 또 다른 징후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면 크게 소리라도 질렀을 정도의 참담함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밀어 닥쳤다. ‘deadlock’이라는 단어 외에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통찰력은 지혜의 정화지만 동시에 슬픔의 원천이며 그렇기에 자신은 운명의 방관자가 되어버렸노라고 아페르티프로 보기에는 지나친 몇 순배의 술잔과 함께 독백을 일삼던 시시한 소설의 쓰러져가는 한 인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같은 인물로 늙고 그와 같은 epitaph를 가지게 되겠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국 내가 서있는 지평선이 전술한 이 슬프고 우울한 현실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온다

스물일곱

1.
스물일곱 가을은 위기의 계절이고 망실의 시기이며 불운으로 말문마저 막혀버린 시간이다. 그런데 쓰고 보니 어느새 첫눈마저 내린 겨울이 와 버렸다. 어깨너머로 흘려버린 어제의 작은 생채기들이 남기고 간 잔금들이 이제는 본격적인 붕괴를 알리는 전령이 된 이때에 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거리를 걷거나
지하철에서 보내는 무의미한 시간이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깊게 과거로 침잠해 있곤 한다. 무엇을 찾아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 채
기억 속 어딘가로 바쁘게 여행을 떠난 나는 사람들의 눈에 어찌 보일까?

사실 지금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향한 끊임없는 열정.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사실이 주던 그 총천연한 즐거움. 짧아지는 연필이 가져다주는 뿌듯함. 그 감정의 끝자락을 다시금 붙잡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고루하고 또, 고루한 삶이라 불평했지만 기실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음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애석하게도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지는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가장 좋은 해법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했던 순간은 없었다. 입으로 뱉어내는 말에 거짓이 섞였을지언정 그 말로 스스로를 속여본 적도 없다.
하지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무언가를 행하는 내 마음가짐이었다. 내 마음에 흡족한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왜 이리 현현되기 어려운 것일까.

열아홉 겨울 같은 심란한 마음에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그런데 몇 주 째 전화가 꺼져 있다. 살아는 있는지 혹은,
무언가 중대한 결심으로 은둔을 선택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그래서 서글픔을 지울 수 없는 스물일곱 가을 혹은
겨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2. 연필깎이 기능이 달린 연필 깍지는 연필 애호가에게 있어 사치를 부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항목이다. X-file에 열광했던 십대 중반에는 언제인가  연필 고무가 달린 노란색 Staedtler를 두 다스쯤 벌여놓고 쓰고 싶었는데 어느 사이에 변해버린
취향은 사춘기 소년의 소박한 소망 따위로는 만족할 줄 모른다. 혹자는 초등학교 앞 문구점을 중심으로 판매되는 요란한 장식의 연필
깍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깍지는 금속 메탈 소재에 A/S까지 가능한 물건이다. 어찌 되었건 지난 봄 잃어버린 연필
깍지를 새로 들였다. 지금껏 몽당연필 상태로 울고 있던 Faber Castell 참나무 연필들이 간만에 멋을 되찾고 책장
사이를 굴려 다니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이 녀석은 그라폰의 파인라이너를 장착한 단풍나무 수성펜과 더불어 요즘 내가 즐겨 쓰는
펜이 되었다. 떠나보낸 크로스의 빈 자리가 여전하긴 하지만 이제 슬슬 이 녀석들과 정을 붙여봐야겠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펜을 바꾼 이후에 사라졌던 열정이 슬슬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새로운 펜은 이 나이를 먹도록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3.
며칠 전 정년을 한 달 남긴 교수님
한 분이 크로스 볼펜과 300원짜리 30센티미터 자로 그래프를 도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마치 프린트한 것처럼 깔끔하고
아름다워 잠시 넋을 잃은 적이 있다. 크로스 펜의 선을 그리기에는 약간 둔중한 펜 끝으로 어떻게 저렇게 섬세한 커브를 그려낼 수
있는지 의아하던 난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질문을 드렸는데 대답인즉슨 펜과 노트의 마찰을 최대한 줄인 채 펜을 지면과 90도를
유지하면서 팔꿈치를 축으로 캠퍼스를 사용하듯이 팔을 1/3 파이만큼 회전하면 된다는 것이 요체였다. 참! 한 가지 빼먹은 것이
있다. 한 40년쯤 그리다 보면 초밥의 달인이 밥알을 100개씩 정확하게 분배하는 것처럼 하얀 노트 위에 선과 공간을 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나. 결론은 요체를 알아도 머리에 피도 덜 마른 나로서는 따라 그릴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란 말씀.

4.
스물일곱의 크리스마스는 비몽사몽 간에 지나가 버렸다. 시골집에 내려온 나는 이브 날에는 와인 한 잔을 마시자마자 잠자리로 직행했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난데없는 눈칫밥을 먹다가 체해 버렸다. 체한 김에 십 년 만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으며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는 했지만 명색이 연인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라는데 현관을 나갈 때마다 애교를 떠는 강아지만이 반기는 크리스마스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5.
한해의 끝자락에서 교훈 하나를 얻게 되었다. 아무래도 ‘누구나 자신의 상황을 가장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라는 교훈과 함께 일생동안 마음에 품고 다녀도 지나치지 않을 교훈이다. 요약하자면 ‘다른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대범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로 멋진 사람이다.’라는 내용인데 기실 자신감이라는 견고한 기단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참을성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던 것 같다. 이 얼마나 졸렬하고 유치하며, 비겁한 행동인가?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단 하나도 양보하지 못하고, 단
하나도 수용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 어느 것 하나 빼앗겨서는 안 되고, 틀려서는 안 되며, 포기해서도 안 되는
사형대 위의 인간으로 사는 것이 동정받아 마땅할 삶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잊었을까? 미운 일곱 살처럼 울며, 큰 목소리만 내면 모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와 그것이 무엇 크게 다를까?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신뢰할만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은 불문가지다. 단지 목소리가 큰 사람이 되고자 지금껏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수용한도가 좁은 것은 반드시 타결되어야만 하는 협상에서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 얼마나 우울하고 몰염치한 혜택인가? 그런 혜택에 빌붙어 사는 삶은 또 얼마나 헐벗은 것일까? 이것은 타인의 관대한 도량에 기대 자신의 궁핍한 의견을 인정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감이 부족해 목소리가 큰 사람으로 평생을 사는 일은 잠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괴롭다. 이제는 이 못된 손님과 반가운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Thanks for your advice.

6.
정말 울고 싶었던 스물일곱의 마지막 날이다. 끝내 울지는 못했지만 먼 훗날 이 시기를 생각하며 선한 눈웃음과 섬세한 애정으로 이 시기를 묘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닌 것이라고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믿음으로 나를 신뢰해주는 몇몇의 애정밖에 없는 마개 잃은 유리병, 피처럼 촛농을 떨어뜨리는 양초 같은 시기였지만 곧 ‘즐거운 날’이 왔다고 말이다.

Good bye Cross!

21살 봄부터 지난주까지 온갖 풍상을 함께 겪어온 크로스 볼펜을 버로워즈에게 앗겼다. 앗긴 충격이 어느 정도냐면 ‘너복설과’에 해당하여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크고 작은 시험을 함께 치렀고, 진심을 담은 수많은 말들을 함께 써내려갔으며, 수많은 커피집과 여행지에서 벗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기차에 앉아 혹은 비행기에서, 차창 너머를 보며 어깨너머로 흘러가버린 사건과 사람들을 묘사하던 녀석의 마지막이 이렇게 허무할 줄은 몰랐다. 누구보다 내 속마음을 잘 알던 녀석이었는데, 쓰기는 했지만 보내지 못한 채 사그라진 그 불꽃을 기억하는 유일한 녀석이었는데.


만약 알았다면 그 흔한 각인 한 번 해주지 못하고, 쓰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까닭으로’ 밖에 쓰지 않는 펜들 사이에 너를 무심히 놔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사람들은 고작 볼펜 하나에 치졸할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나를 비웃겠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떠난 들 이렇게 헛헛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에게 새로운 리필심을 선물 할 때 짓던 표정 없는 그 미소를 본 사람은 나 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명예로운 은퇴를 허락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난 네가 지닌 행운을 포기할 여유가 되지 않았단다. 부디 나보다 더 좋은 주인을 만나 새로운 이름을 얻기를.

愛貰冊論

어린 시절부터 나를 보아온 친구들은 지금의 모든 노력이 먼 훗날 연애소설을 즐길 줄 아는 곱게 늙은 노인으로써의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이것은 그들이 잘 내려진 커피 한 잔과 함께하는 재미난 소설 한 권에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지금 막 달콤한 입술을 훔친 사람처럼 만족감에 빠진 내 표정을 기억하고 있으며, 입으로는 ‘서시 같은 미녀’를 입술에 달고 살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탐독증에 걸린 사람마냥 책을 먹어치우는 삶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야심이랄지 야망이랄지 것들이 남보다 부족하지는 않지만 기나긴 삶 동안 야망 하나만을 지주로 삼기란 무리다. 신내림을 받아 작두에 올라탄 이의 무아지경처럼 책을 읽는 동안의 나 역시 그런 몰아에 빠진다. 문장이 지니는 독특한 호흡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는다. 그때의 평화로움과 행복감을 알기에 되려 난 감정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진짜배기 사랑에 서투른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복잡한 수사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라든지, 세상 여자 모두가 소설 속 여주인공처럼 독심술의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곤 한다. 게다가 진짜 사람사이에서는 세상이 얼어버린 듯 멈추어버린 시간의 공백이 없다. 오 맙소사! 

친구들에게는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든지, 정치적 성향이 유사한 사람과 결혼하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상 내가 빠져보고 싶은 사람은 훌륭한 서가를 소유한 사람이다. 읽기는 했으되 주머니 사정으로 사지 못한 특정 시기의 유산들을 보물처럼 품고 있는 서가도 좋고, 읽으려 마음 먹었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린 책들로 꽉 찬 서가도, 나와 비슷한 취향으로 가득 채워진 서가도 좋다. 굳이 많은 장서를 자랑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질이지 양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안목이 기호를 말하는 시대가 아닌가? 게다가 운이 좋다면 『Ex Libris』의 저자처럼 서재를 결혼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근래 들어 입에 올리기 시작한 새말 가운데 하나가 서점증후군이다. 자발적 독신증후군에 이어 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이어지는 대화의 새로운 소재인데 요약하자면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기 보다는 되려 아름답다는 이야기이다. 둥그런 허벅지와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지닌 립밤으로 윤을 낸 입술의 여자보다는 에밀 아자르를 읽는 여자가 더 눈에 띄는 법이다. 키엘 립밤을 쓰냐고 말을 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의 이야기로 말문을 여는 것은 쉽다. 굳이 대문자로 쓰인 폴리오가 무엇인지 인큐내뷸러가 무엇인지 몰라도 된다. 그저 드라마보다 소설을 소설보다 나를 조금 더 좋아해주면 그만이다.

P.S.
장난 반, 투정 반. 나머지는 하릴 없이 내리는 지겨운 비때문에

출사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 뭣하면 나한테 오면 되는 것 아니겠어’라고 말하곤 했던 친구가 있다. 그 말을 던질 때마다 농담을 가장하긴 했지만 기실 마음마저 허튼 농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런 농담은 순천연한 농담이라기 보다는 슬쩍 마음을 떠보는 치사한 수작에 가깝다. ‘안녕’이란 인사와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를 구분하는 나쁜 버릇을 지닌 나로서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서른쯤 되면 우아하지는 못해도 거짓말 같지는 않은 말을 던지게 될 줄 알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조차 없는데 녀석의 마음이 단호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확신을 가지게 될거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니 마음 한구석으로는 드라마나 소설에나 어울릴 상황 전개를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서서히 나이란 것을 먹고, 그러다 보니 쌓인 신뢰와 시간이라는 덫에 물리는 상황 연출을 말이다. 그렇기에 ‘좋긴 하지만 이제와 새삼스럽게’란 말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자 했던 친구들의 시선을 속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후회할 것이라는 친구들의 협박에 ‘나중에 술 한잔 마시면서 털어버리면 되는 것 아니겠어’ 하고 대거리를 했던 만용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불순물이라고는 섞여 있지 않은 녀석의 단호함과 마주하고 나니 이래저래 입맛이 쓰다. 연인이 아니라 머슴을 찾는 것이 아니냐고 쏘아줬지만 녀석에게 비춰진 난 ‘Love is the only thing I wonder’이라고는 믿을래야 믿을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하고 거기에 더해 고집쟁이에 헌신 따위는 모르는 사내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이 글을 읽고 ‘나 같은 미인을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안한걸’ 이라며 웃음을 터트릴 것이 뻔한데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부터라도 모호함을 버리고 ‘I hope to write on your empty page’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출사표를 쓰는 셈이라고 위안해보지만 변명치고는 참 궁색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