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가치를 잃지 않는 책이다. 좋은 역사책은 먼 과거의 이야기를 읽고 있음에도 오늘의 이야기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의 절판에 놀라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남은 전작을 사들였는데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은 이런 정의에 딱 맞는 책이다.
이치시다는 특유의 담담한 어조로 청조를 배경으로 과거 시험의 절차를 따라간다. 생원이 되기 위한 학교시인 현시, 부시, 원시, 중간점검인 세시, 거인이 되기 위한 과거시인 과시와 향시, 진사가 되기 위한 거인복시와 회시, 황제가 주관하는 회시복시와 전시, 한림학사가 되기 위한 조고까지 아찔한 과거 시험을 따라가고 있노라면 나 또한 몇 번은 과거에 낙방하고, 고생 끝에 진사가 되고 마침내 관리가 된 기분이다.

허생원이나 황진사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호칭은 잠시 잊자. 조선의 생원・진사와 명・청대 생원・진사는 같은 단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치사다는 비단 시험의 절차뿐만 아니라 시험장의 풍경까지 세세하게 그려낸다. 향시와 회시가 치러지는 공원(貢院), 전시가 치러지는 태화전을 중심으로 그려내는 수험생의 일화는 풍부하고 재미난다. 아니 어느 순간에는 으스스하고, 어느 지점에서는 너무 깊게 이입하여 수험자들이 겪는 고난이 내 고통처럼 생생하다.
사실 이 책의 가장 놀라운 점은 1963년 담담하게 그려낸 사실이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는 데 있다. 교육과 관리 임용이라는 과거제도의 두 가지 측면을 꿰뚫으면서 부실한 공공교육제도,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평생직장인 관리를 희망하는 방대한 지식계급과 부족한 관직이라는 미스매칭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이런 문제는 비난 청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중국, 일본, 우리나라 모두에게 적용된다. 과거 대신 대학 졸업자를 현대 중국에 끼워 넣으면 방대한 대학 졸업자들에게 돌아갈 충분한 (좋은) 직업 수의 부족을 ‘新하방정책 ’으로 이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경우 첫 직장이 평생직장-혹은 직업-이 되는 경제구조에서 좋은 ‘첫 직장(직업)’을 구할 기회가 되는 대학이 왜 그렇게 첨예한 문제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된다. 조선의 과거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중국의 과거는 1904년 생명력을 다한 것처럼 보이지만 2024년에도 이름과 절차가 바뀌었을 뿐 과거라는 경쟁의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할 법한 악령인 ‘진’을 무기화하려는 소련(러시아가 아니다)의 계획의 분쇄하는 이야기를 담은『디클레어』를 읽으며 오래된 첩보물을 언급하는 이유는, 『디클레어』가 악령과 신비가 존재하는 환상 소설이면서도 정통 첩보물의 미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당국에 의해 키워진 옥스퍼드 출신 학생이 이중첩자가 되고, 제2차세계대전 중 현장요원이 되었으며, 대전 중의 파리와 베를린을 거쳐 최후에는 아라라트산 정상에서 오랜 싸움을 마무리 짓는 다소 식상한 전개일 수도 있으나, 이야기의 흐름을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오랫동안 기대했을 정도로 훌륭하다. 주인공인 헤일은 MI6와 CIA를 초토화시킨 킴 필비와 케임브리지 5인조와 대칭적인 역할을 맡는 동시에 말더듬이 필비의 목격자이자 대적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