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

딸아이는 가끔 자기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예쁜 딸에게 아빠도 한때는 같은 소망을 가졌으나 가난한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조지 오웰의)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려다 참곤 한다. 하지만 역사는 어린 시절이나 중년이나 내가 가장 오래 애착을 지니는 취미생활이다. 오랜 취미생활이다 보니 이제는 선호하는 작가군도 분명하게 있다. 그리고 가끔 날을 잡고 새롭게 번역되는 신간이 있는지 따로 챙기기도 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도 그런 작가 가운데 한명이다.

『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는 이런 내 루틴을 빠져나간 책이다. 너무 빨리 절판되었기에 존재조차 몰랐던 책. 우연히 발견하여 중고서점을 뒤지다가, 어렵게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막상 상호대차를 통해 도착한 책은 훼손 정도가 너무 심해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읽기 어려웠던 책. 양산박의 108 호걸만큼이나 구구절절하다.

사실 류짜이푸의 『쌍전』을 읽은 뒤 『수호전』에 대한 인상은 나빠졌다. 류짜이푸가 지적한 몰인간성과 잔혹함, 집단 밖에 대한 차별이 마음에 진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사다는 『수호전』을 송대의 역사적 현실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차분하게 탐구한다. 황제, 재상, 환관 같은 송나라의 통치에 깊숙하게 관련된 인물부터 수호전의 주인공인 하급 관리와 군인, 간수와 도둑, 도사와 중까지. 이치사다는 북송 휘종의 정치가 지배 메커니즘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다시 사회의 저변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런 흐름이 궁극적으로 북송의 멸망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수호전을 분석하는 것으로 드러낸다. 물론 송대의 관직과 사회상을 통해 수호전의 인물들을 상상 속이 인물이 아닌 실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양산박의 인물들에 대한 분석보다 더 마음에 닿았던 문장은 이치사다가 구법당과 신법당의 싸움으로 문란했던 송대의 관리를 ‘뇌롱’과 ‘찬영’이란 두 단어로 설명한 부분이다. ‘뇌롱’은 농락의 유의어지만 지금은 사실상 사어가 된 말로 동물의 우리와 새장을 뜻하는 단어이다. ‘찬영’은 아첨은 아첨이되, 격조를 갖춘 윗사람에 대한 칭송을 의미한다. 풀이해 보면 젊어서는 ‘당여’가 되어 ‘영수’에 대한 ‘찬영’을 통해 빠른 승진을 누리고, 이렇게 승차하여 당의 ‘영수’가 되어서는 젊은 ‘당여’를 좋은 벼슬과 긍정적인 품평이라는 우리와 새장에 가두어 원하는 대로 조정한다는 의미이다. 구백 년 전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오늘날에도 시사점이 많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가까이 회사만 보아도 ‘당’ 대신에 ‘이너 써클’로 통칭하는 집단이 있고, 이 집단의 구성원인 ‘당여’는 ‘영수’인 임원에 대한 홍위병 역할을 하며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영수’는 선호되는 자리와 한나라의 관리선발제도인 ‘무재와 효렴’같은 ‘내가 일해봐서 아는데 에이스야’라는 품평을 통해 보답하는 결착의 구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번 만들어진 결착의 구조는 배분할 자원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북송이 ‘정강의 변’을 통해 확실한 난세에 접어든 뒤에야 이런 결착이 다소 잠잠해진 것처럼 말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이 책은 『수호전』을 재미나게 읽었으나 마음속에 깊은 곳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최고의 책이다. 역사와 소설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시점을 바꿔가며 도적의 시대를 그려내는 솜씨가 여간 재미나지 않기 때문이다.

초조한 마음

방학 첫 주를 맞이하여 아내와 딸은 제주 여행을 떠났다. 이런저런 이유로 휴가가 얼마 남지 않은 나는 서울에 남았다. 아내와 딸이 여행을 떠난 동안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다 읽기로 마음속으로 굳건하게 맹세했다. 사실  『초조한 마음』을 서재에 들인 것은 거의 십 년 전의 일이다. 내가 먼저 책장을 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내가 나보다 먼저 읽기 시작했고, 아내는  『초조한 마음』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내는 애서가가 아닌 서재관리인이 된 나에게 해마다 『초조한 마음』을 읽을 것을 권했다. 더 이상 예술로서의 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나에게 계기가 될 것이라며 아내는 권했고, 또 권했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회사에 다니면서다. 첫 3년 동안의 나는 회사의 특이한 구조에 대해 동료들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번민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와 보내는 행복한 시간에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두 번째 3년 동안의 나는 유배지에서 비루함을 곱씹고 있었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워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세 번째 3년 동안의 나는 아이를 매일 볼 수 없는 춘천 근무에 힘겨워 책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자꾸 처음부터 다시 읽는 책이 너무 많았고, 서울과 춘천, 출장지 사잇길에서 시간이 덧없이 사라졌다. 네 번째 4년 동안의 나는 신문에 검색하면 나오는 실패한 사업에 내 삶을 모두 던져넣었다. 내가 가진 재주와 능력을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책 대신에 연구자료를 읽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모델링을 하고, 가능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일에 매달리는 삶의 덧없음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삶을 잊으려고 책 대신 일을 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실패와 함께 다시 유배지를 택했다. 다시 온 유배지에서 나는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간섭도 없고, 책임도 대수롭지 않은 유배지에서 무엇을 읽을지 계획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젊은 시절의 나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시간을 붙잡고 싶을 만큼…… 애서가로서 느꼈던 지난 15년 간의 ‘초조한’ 마음을 요약하면 위와 같으리라.

다시 『초조한 마음』으로 돌아가자면 이제 겨우 절반 넘게 책을 읽었다. 하지만 절반을 넘은 순간 내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하다. 무슨 일이 남아 있을지 짐작할 수 있기에 책장을 넘기기 어렵다. 아내에게 왜 이 책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는지, 삶을 갈아 넣었던 일의 실패로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아내가 부탁한 유일한 일이 왜 이 책을 읽는 것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젊음이 무엇인지, 나약함이 무엇인지, 연민이 무엇인지, 초조함이 무엇인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나약함이 그리스 신화의 ‘Hubris’와 같은 맥락이 될 수 있는지, 이 이야기는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츠바이크의 글을 『낯선 여인에게서 온 편지』였는데 아직 책장을 다 넘기지 못했음에도 앞으로 평생 가장 좋아하는 츠바이크의 소설이 될 것임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을 내 눈에 고인 눈물이 증명해 주리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고통으로 넘기지 못했던 책장을 끝까지 넘겼다. 절반쯤 읽었을 때 느꼈던 예감은 비껴나지 않았다. 하지만 예감이 무슨 소용일까?

사실 츠바이크는 예리한 심리묘사와 아름다운 문장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작가는 아니다.  다만 기껍게도 『초조한 마음』은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덕분에 다른 소설에 비해 되려 널리 알려진 편이다. 영화가 소설의 액자식 얼개와 흐름의 일부를 빌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과 다르다. 츠바이크의 소설은 장면이 아닌 문장을 음미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초조한 마음에 대한 집대성이다. 누구나 겪어 보았을 법한 연민, 동정, 철 없는 자부심,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마음속 작은 속삭임에 따랐기에 커지는 사건. 그 가운데 느끼는 잠깐의 평화, 자기부정과 학대,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당한 분노. 비겁함, 그리고 사람을 막막하게 만드는 슬픔과 절대 속일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이 소설을 주인공 안톤 호프밀러 소위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나는 조금 더 실수를 잘 인정하고, 타인의 실수에 관대하며,  초조한 마음을 더 잘 이해하는 중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중년이 되었기에 소설 속 주인공의 마음과 행동을 더 잘 이해하고, 이 소설의 가치와 슬픔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 소설 속 주인공 호프밀러이다. 사건과 배경은 좀 달라질지 몰라도 우리가 초조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때가 있었다. 순수문학의 열화와 장르문학의 전성기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둘 사이의 차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세상에서는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나누는 일 자체가 부질 없이 느껴진다. 국내의 대표적 포털인 네이버에서는 더 이상 서지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네이버가 바라보는 책은 학문적, 예술적 가치를 가진 매체가 아니라 최저가 검색을 통해서 판매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이런 개탄스러운 세태보다 더 슬픈 부분은 예술적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이야기를 찾는 일이 해마다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문단은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닌 쓰이기 위한 글을 제단에 올려놓고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고 있고, 장르소설의 반짝거림은 디지털컨텐츠의 상업화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런 세상에서 장르문학인  SF소설에는 어떤 미래가 남아있을까? pastedGraphic.png

SF소설계의 주요 상을 휩쓴 작품임에도 이 소설의 초반부는 읽기 힘들다. 짧든 길든 모든 SF 소설은 독립된 하나의 세상을 담고 있고, 그 세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정보를 통해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 갈 수 있는 법인데 이 소설이 그리는 세상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가든」과 「에이전시」의 목적, 시간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방식과 결과. 소설 속의 두 세력이 두 주인공에게 지시하는 임무가 각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이 소설의 핵심 배경이라 불릴 만한 위의 것들은 불친절한 공란으로 남아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전까지 이 세계는 기괴망측할 뿐 울림이 없다. 과도한 부정형의 인물, 명확한 배경과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현란하기만 한 세상은 읽으면 읽을 수록 작위적일 뿐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챕터가 지날 때마다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시간 전쟁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내가 졸음과의 전쟁에서 왜 패배하는지는 분명히 알겠다.

다행히 중반부를 넘어선 순간부터는 그나마 나아진다. 뻔하고 상투적인 전개이지만 결말을 풀어나가기 위한 복선의 매듭이 명쾌해지기 때문이다. 여전히 소설의 배경은 미지의 영역이지만 이야기의 얼개를 이해하는 순간 페이지는 폭발적으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잘 쓰인 글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없는 익숙한 플롯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두 작가의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이 정교하게 얽히는 정교한 느낌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쓴소리를 내뱉지 못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두 사람의 작가가 각각 「레드」와 「블루」로 나뉘어 각자의 세계를 그리고, 만나지 않은 채 이메일로 이 소설을 썼다면 매우 훌륭한 창작 실험이 되었으리라. SF소설의 창의성이 메마른 이 시대에 어찌 보면 이것도 새로운 상상력의 표본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험이 예술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쓰이기 위한 소설, 아이디어로 쓰인 이야기의 한계는 분명하다. 내 마음을 씻어내기 위해 코니 윌리스의 『마블 아치에 부는 바람』을 다시 읽어야겠다. 뭔가 진기한 재료와 화려한 레시피로 만들었지만, 맛은 없는 장식품 같은 음식을 먹은 기분을 달래기 위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