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후

딸이 ‘SNS’가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가 아니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SNS’가 아니라 ‘SM’, ‘Social Media’라고 정정해 주곤 한다. 싸이월드를 경험하지 못한 딸에게 인터넷 공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중독성을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뭐든지 빠른 딸 세대에서는 이미 어린이들마저 유튜브 스트리밍을 하는 시대이니 어쩌면 내 걱정은 진짜 공염불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중독되기에는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김빠진 것에 어떻게 열광하고 중독될 수 있단 말인가?

갑자기 ‘SNS’와 ‘SM’으로 글머리를 여는 이유는 이 블로그에 대한 글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이 블로그를 개설한 것은 2003년 장마가 끝나가던 7월의 어느 날. 어느 사이에 이십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시대를 풍미했던 블로그(web+log)라는 단어는 구차해지고 낡았다. 이제는 트위터, 페이스북의 시대도 끝났고, 틱톡과 인스타그램, Reels의 세상이 되었다. 한때 매일 같이 쏟아지던 피드는 거의 소실되었고, 내가 자주 방문하던 블로그 가운데 살아 있는 블로그는 4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2003년 처음 블로그를 만들던 날, 당시의 나는 블로그라는 전자적 매체의 수명이 얼마나 될지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기술의 발전 속도로 볼 때, 이십 년 정도의 시간이라면 화석이 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다만 이십 년 뒤 내 젊은 날을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이 되기를 바라며 막연한 마음으로 이 블로그의 첫 글을 남겼다. 마치 삼총사의 후일담인 뒤마의 ’20년 후’처럼 말이다. 이 시간에 쓴 글은 거의 600편 정도 되는 것 같고, 대부분의 글은 처음 2년, 그리고 그다음 5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그 사이 이 블로그는 서비스형 블로그인에서 설치형인 태터툴즈로 갈아탔고, 태터툴즈마저 사라진 십 년 전쯤에는 워드프레스로 글을 옮겼다.

사실 꽤 오랫동안 블로그에 관심이 없었다. 중년의 내 삶은 회사와 가정으로 양분되었고, 나는 더 이상 애서가가 아니다. 책 없는 삶은 죽음과 같을 줄 알았는데 나는 요즘 라면 받침 수준의 잡서를 읽으며 활자중독증을 이겨낸다. 아름답고 좋은 글을 읽으며 내 삶이 황홀하기를 바라기에는 내 마음이 무섭도록 꼬여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삶의 순간을 글로 남기는 것은 오해를 쌓는 일이며, 그 순간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내 삶의 진짜 독자인 나 스스로는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음에도 타인은 쉽게 오해한다는 사실을 지겹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독립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그 귀중한 순간을 더 이상 이 블로그에 남기지 않았다. 딸이 태어나던 그날의 기억. 매해, 매 계절 우리 세 가족이 쌓은 기억들. 함께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하며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들. 삶의 힘들었던 순간들과 내 마음에 쌓인 울분에 대한 기록은 여기 없다. 그저 기억 속에만 있을 뿐. 기억은 기억이 아니라 글로 표현되었을 때 더 견고해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이를 먹을 수록 이러쿵 저러쿵이 귀찮아졌다.

그러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갑작스레 2003년 7월부터 역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중년이 된 지금의 기준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짝사랑에 힘겨워하던 내가 쓴 글을 읽으며 부끄럽기보다는 재밌었다. 횡설수설하고 괴로워하는 젊은 내가 그 안에 있었다. 암호처럼 꼬아놓은 문장을 다시 해석하는 일은 좀 버거웠지만 한번 기억의 물꼬가 터지니 글 속에 담긴 순간들이 어제 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읽다 보니 갑자기 몇 개의 글에는 후일담을 쓰고 싶어졌다. 내가 비밀처럼 언급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 이십 년 동안 그들의 삶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후로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보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주석처럼 옛글에 덧달고 싶어졌다.

사실 옛글을 읽으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밝게 빛나는 친구들의 존재와 다시 조우했을 때였다. 모든 것이 희미해져만 가는 중년의 내게 젊음으로 밝게 빛나는 친구들의 흔적이 제일 반가웠다. 젊은 아내의 흔적을 만나는 일도 좋았고, 내가 읽었던 책들과 공연들, 전시회와 여행은 세파에 찌든 내게는 새로운 구원이었다. 그 시절 기대했던 그대로. 이 블로그는 20년 후 과거를 만나는 훌륭한 장치가 되어주리란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사실 이 블로그에 등장하던 많은 것들은 이제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변한 부분도 있고, 시간이 훼방을 놓은 부분도 있고, 오해가 악재가 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든 지금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내가 사랑하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삼십 대의 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아쉬움도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던 소설인 『표절』의 주인공 에드워드가 니콜라 파브리에 대한 복수를 끝내고 이제는 더 이상 원고 냄새를 맡는 편집자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글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는 끝마무리가 떠오른다. 앞으로 다시 20년이 지난 다음에는 ‘다시 찾아온 20년 후’라는 제목의 글을 쓰며 내가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는지, 어떻게 다시 책을 사랑하게 되었고,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넘어가는 친구들에 대한 후일담과 행복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대한 찬가를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다시 가을!

내게는 지난가을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날이 추워짐에 따라 옷이 두꺼워졌다는 사실과 어둠이 일찍 내려앉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늘 똑같이 바쁘고 여유 없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니 가을이 깊어질수록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추운 시기에는 취객으로 가득 찬 새벽 한 시의 마지막 버스를 타는 것이 일상이었다. 배신당할 부질 없는 노력임을 알면서도 해야 하는 순간이기에 그냥 견딜 수밖에 없었다. 서푼짜리 망한 연극이 되리라는 사실이 매일 분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올해의 일상은 거짓말처럼 작년과 정반대이다. 이사한 지 여덟 해라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처음으로 산책하는 기분으로 집까지 걸어서 퇴근을 시작했다. 다섯 시에 회사에서 걸어 나와 공사로 번잡한 삼성역을 지나면 하루하루 황량해지는 가로수가 나를 반긴다. 고시 공부를 하며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며 좁은 삼성교를 지나 탁 트인 탄천과 한강을 바라본다.  11시 방향에는 지난가을 새로 그리고, P & L을 뽑았던 주경기장과 야구장이 들어온다.  번잡한 회사 동네에서 딸아이가 기다리는 우리 동네로 넘어가는 찰나의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귀계로 북적이는 복마전에서 벗어나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베드타운에 도착했음을 몸과 마음 모두가 알기에 나오는 웃음이다.

지어진 지 40년에 가까워진 야구장은 내 이십 대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갈수록 줄어드는 노점상 사이로 담배 연기가 솟아오르고 야구팬의 구성도 그때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야구장을 지나 주경기장을 만나면 새로운 막이 열린 것처럼 날마다 새로운 퇴근길의 매력을 발견한다. 어느 날에는 김수근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궁궐의 유려한 처마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고, 어느 날은 태양의 서커스를 위해 설치하는 빅 텐트의 반짝거림에 감탄할 때도 있다. 하지만 늘 나를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주경기장에서 체조경기장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가로수길이다. 수령이 얼마인지도 알 수 없으나 아파트 8층 높이로 자란 나무들은 말없이 나를 반긴다. 이제 집까지 절반 남았다.

나머지 절반의 걸음은 매일 다르다. 어느 날은 느린 음악에 맞춰 짧은 보폭으로 느리게 걸을 때도 있고, 허기가 느껴지는 날에는 큰 보폭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뒤엎고 전시장과 호텔이나 지으려고 몇 년을 보냈나 하는 후회는 늘 같다. 그리고 그 일을 더 이상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제 마지막 횡단보도다. 아직 이 횡단보도를 기다리지 않고 마법처럼 한 번에 건너본 적은 없다. 그러나 올해가 가기 전에는 그마저도 성공할 것 같다.

테러호의 악몽

오랜 시간을 투입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맺음이 된 프로젝트를 마음속에서 흘려 보내고 나니 이제야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춘천과 서울 사이의 길 위에서 보낸 3년 동안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던 애서가의 마음은 일에 온 마음을 뺏기는 동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사라져 버렸다. 결국 이번 책도 2015년에 읽기 시작해서 2021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우습게도 170년 전 사라진 진짜 ‘테러호’가 북서항로의 수중에서 발견되었을 정도이니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댄 시먼스는 내가 코니 윌리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일리움』, 『올림푸스』, 『히페리언』 시리즈까지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은 모두 SF소설의 수작이었고, 내 마음에 신선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테러호의 악몽』 역시 내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으며, 되려 북서항로 개척이라는 북극 탐험과 결합하며 작가의 다른 SF소설에서 찾기 어려웠던 사실주의적 색채까지 묻어난다. 미비한 준비와 탐험대장인 프랭클린의 우유부단한 판단력으로 애초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탐험대는 겨울에는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극빙에 두 척의 함선과 갇히게 된다, 최신의 식량 보존 기술인 줄 알았지만 치명적인 보툴리누스균과 납중독을 일으키는 깡통 식량, 괴혈병으로 무너지는 육체들, 그 가운데 댄 시먼즈의 전매특허처럼 나타나는 빙하의 괴물-어떻게 보면 히페리온 시리즈의 슈라이크 같은 존재- 은 해조차 들지 않는 겨울 부빙에서 탐험대를 옥죄인다.

프랭클린 경의 북서항로 탐험은 19세기 탐험의 역사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내는 신비로운 사건에 속한다. 기범선으로 개조된 최신 탐험선 두 척이 실종되었다는 점에서, 두 척의 실종선에 참여한 탐험대원들 다수가 북극과 남극 탐험에 참여한 베테랑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당대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왔고, 후속 탐험대에 의하여 보고서와 일부 대원들의 무덤, 무너진 캠프가 발견되면서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이누이트들은 캐나다에서 북해로 흘러드는 백강 어귀에서 실종된 대원들이 마지막으로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후속 탐험대원들은 실제 이들이 사용하던 소품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바다 한가운데 극빙에서 탈출하여 240여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사라진 탐험대가 남긴 잔해는 오늘날 극지탐험의 유물이 되었다.

댄 시먼스는 이 사건을 멋진 플롯과 섬세한 묘사로 이누이트 설화와 결합하며, 실존 인물인 테러호의 함장 크로지어를 통해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한다. 여름이 와도 녹지 않는 극빙에서 괴물과의 조우, 극빙의 압력에 쪼개지고 있는 함선을 탈출하는 선원들의 분투, 끝내 추위와 괴혈병, 식량 부족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반란과 식인. 그리고 밝혀지는 괴물의 정체를 통하여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탐험대에게 새로운 역사를 부여한다.

사실 이들의 실패는 극지탐험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두 척의 함선, 백 수십 명의 숙련된 선원들로도 – 사실 19세기 태평양의 대부분의 섬은 이 정도 인원으로 발견되었다- 극지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는 인식을 토대로 유럽인들은 이누이트 족의 극지 생존 기술을 습득했으며 결국 북극과 남극의 극점 발견, 북서항로를 개척에 성공했다. 북서항로의 상업적 가치는 별론으로 하고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