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erium, Story of America, etc

청소년기에는 역사의 화려함에 끌리지만 나이를 들수록 되려 그 꾸준함에 매료되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내게 다가온 역사란 영웅들의 화려한 투쟁이었는데 지금의 내가 바라보는 역사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 흐름이 그 특질을 고스란히 들어내는 순간에 포착된 일련의 사건들에 불과하다. 어느 사이에 애정과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면 영웅들 자리를 영웅들의 삶과 행동을 제약하던 거대한 흐름이 대신한 모양이다.

아무튼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요즘의 난 3권의 교양 역사서를 탐독하는 휴가를 즐기는 중이다. <임페리움>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이하 미국사)> 그리고 며칠 전에 출간된 로마인 이야기의 열세번째 편이 그것인데 일주일도 되기 전에 모두 마무리를 지었다. 휴가를 화창한 봄날이 아닌 두툼한 책뭉치에 내던져 버린 내 자신이 무척이나 무능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른 봄 치고는 확실히 차가운 바람이고, 이런 바람에 꽃은 피지 않으며, 어느 지방에는 폭설까지 내린 마당에 이런 날씨를 화창한 봄날이라 부르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휴가를 간서치로 보낸 것 역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 말할 수 있다.

IMPERIUM
개인적으로 난 드라마만큼이나, 혹은 영화만큼이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케이블 텔레비전의 히스토리 채널은 내 애청 채널 가운데 하나이고, 이곳에서 난 다큐멘터리의 신선함과 엉성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사실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심심찮게 눈에 띄는 다큐멘터리의 편견과 오류는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과 오류에도 불구하고 문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실체에 대한 접근은 늘 신선하다. 책으로 읽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의 차이랄까?

사설이 길었지만 임페리움을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표현은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옮겨놓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그대로 책으로 옮겨놓은 만큼 다큐멘터리의 장점과 단점도 그대로이다. 화려한 볼거리는 많지만 가끔 눈에 띄는 오류가 신경을 자극하고, 새롭게 제시되는 관점과 두리뭉실한 결론도 똑같다.

하지만 우리가 스토리가 뻔한 영화나 드라마에 열광하듯이 명저로 분류되는 교양 역사서의 세계에서의 일탈은 즐겁다. 사료 취합에서 들어 나는 독일인다운 냉정함과 사근스런 낭만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고, 다큐멘터리 특유의 과장도 봐줄만 하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꽤나 탄탄한 기획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다. 이집트와 페르시아, 카르타고와 로마라는 고대의 4대 제국을 통해 보여주는 제국에 대한 접근은 센세이셔널하며 권력의 오만과 몰락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배열된 이야기는 꽉 찬 느낌이다.

비록 이 책의 방식이 근본적이고 표준적인 접근 방식은 아니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제국과 고대사에 대한 흥미를 고취 시키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흥미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바라기에는 미흡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어차피 역사란 한 권의 책으로 요약 정리가 가능한 단순하고 명쾌한 장르가 아니다. 고대사에 대한 인식의 기초를 다질만한 책은 아니지만 흥미의 기초를 다지기에는 충분하다.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 정도면 부족하지 않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미국사
내가 지금껏 알아온 미국사는 세계사의 일부로서의 미국사이다. 근대 세계사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나라이자 현대 전쟁사에 자주 언급되는 나라이고 경제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나라. 부분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도 모르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어린 시절의 난 청아출판사의 <이야기 미국사> 한 권을 읽고는 고작 2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더 이상 이 나라에 대해 알려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미국사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내 삶에 버려진 역사였다.(앙드레 모로아에 끌려 그의 미국사를 읽긴 했지만 이것은 순전히 모로아에 대한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미국이란 나라가, 미국사가 실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간다. 유럽의 르네상스와 고대 로마에 대한 기호는 취미 생활에 불과하지만 미국이란 나라를 알아가는 것은 실생활을 위한 것이고, 취미가 아닌 현실적인 목적인 경우가 많다. 우아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이들의 문화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최소한의 정치적 실체인 미국을 외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마음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워도 실체상의 제국이 오늘날의 세계에 현존 한다면 그들을 아는 것이 모른 것보다는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미국사>에는 우리를 질색하게 만들 미국주의는 담겨져 있지 않다. 이 책의 정치적 중립성은 높이 살만하고, 보통의 역사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은연중에 삽입되어 있는 정치 철학도 보이지 않는다. 인권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이 담겨진 부분이 눈에 띄긴 하지만 중립성을 훼손하기 보다는 보편적인 인류애의 시각에 가깝다.

서술은 담담하고 평이하다. 행간에 비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저자의 숨겨진 태도에 불과하고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드러나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이 책은 진짜 현대사로 분류될 지난 30년동안의 미국사에 대해서만큼은 완곡하게 비껴나가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의 역사는 저자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쉽게 접하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니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공정성은 페더럴리스트와 해밀턴에게 보이던 일방적인 내 호의를 중립적으로 되돌릴만큼 엄정하고, 은본위자들에 대한 야멸찬 평가를 수정하게 만들만큼 강력하며, 사실을 숨기거나 더하지 않은 고고함이 마음에 든다. 주제 중심으로 묶인 장(chapter)방식은 통사의 장점을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미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 저자가 선정한 주제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보통의 작가라면 쉽게 지나쳤을 주제를 다루면서도 미국사를 이야기한다는 기본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현대적 지성에 호소하는 분위기는 품격있다. 정치나 경제, 전쟁을 다룬 전문사가 아니라면 지금껏 내가 읽은 어떤 미국사보다 통사로서는 가장 매력적인 책이 아닐까 싶다.

로마인 이야기-열세번째 이야기

카이사르를 다룬 4편이 나오기까지 난 서점에 진열된 로마인 이야기에 눈길도 주지 않았던 듯 싶다. 꽤나 편견이 많았던 당시의 나로서는 인문학의 불모지나 다름 없는 일본인이, 그것도 귀족 여성들의 유희장으로 불리는 학습원의 출신의 저자를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편견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집어 든 그녀의 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책읽기는 어느 사이에 십년 가까운 시간동안 지속되었고 15권으로 예정된 그녀의 life work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려는 참이다.

하지만 3월 2일에 발간된 그녀의 열세번째 이야기는 전편에 비해 재미가 떨어진다. 수많은 로마 황제들 가운데에서도 화려한 조망을 받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스러운 이야기보다 재미가 덜하다. 위기와 혼란 그것의 극복을 노력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란 다소 고전적인 주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에도 흥미롭고,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던 전편에 비해 이번 꼭지는 설익은 과일을 먹은 것처럼 어딘지 부족하다.

사실 이것은 열 시쯤 시작되어 점심이 되기도 전에 종장을 들어낸 얇은 두께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어딘지 계속될 것 같은 열세번째 권의 끝맺음 탓일지도 모르고, 군인 황제 시대를 끝으로 로마다운 활력이 사라진 몰락한 제국을 인정하기 싫은 내 마음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녀의 로마인 이야기 후반부의 3권이 전반부나 중반부만큼이나 재미있고 활력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울한 로마의 몰락은 이미 기번의 쇠망사에서 다루어진 이야기이고, 시오노판 쇠망사라는 출판사의 광고를 믿으면 믿을 수록 기번의 쇠망사와 비교가 된다. 최소한 후반부에서만큼은 그녀의 글은 기번의 역량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번이 이제야 본격적인 쇠망이 시작되었음을 느끼며 미친 듯이 펜을 놀리는 이 시대에 시오노는 모든 열정을 잃고 life work라는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억지로 펜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170027.pdf

4 thoughts on “Imperium, Story of America, etc”

  1. 더 이상 ‘카이사르’ 이야기를 할 핑계가 없어져서는 아닐런지요. (아무리 봐도 저 할머니는 역사 동인녀 -_-)

  2. 가능하면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책장을 펼 때부터 벼르고 있던 그 부분에서 딱 걸리더군요. 동인녀 뜻은 방금 찾아봤습니다. 이제는 아니라고 두둔 해주기 어려운 지경이예요.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3. 1권부터 카이사르 타령하다가 45권에서 폭발하고 그래도 7-8권까지는 이름을 들먹일수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이름을 들먹일 꺼리가 없어서 힘이 딸리시는거예요. 동인녀 절대 맞을꺼예요 orz 13권 감상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느데 전 언제 보게될런지 모르겠습니다. 개강이 왠수예요 -_-;

    그나저나 티켓링크 들어가봤더니 필라델피아 공연 예매를 시작했더군요. 합창석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예당 3층도 8만원짜리밖에 없어서 어쩔수 없이 합창석 하나를 예매해 버렸어요. 6월6일공연인데.. 기말고사로 정신없긴 할텐데(가디너 때처럼요;;) 그렇다고 안갈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네요. 사실 이번에 라보엠 공연도 예매 2달전에 해놓고 결국 못갔답니다. 오페라야 많이 좋아하는게 아니니 괜찮지만 이건 그러면 안될텐데 말이예요.. 에센바흐보러 꼭 가야죠 -_-;

    아무리 바빠도 공연은 보러갈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던것 같아요. 수업을 들으며 공부하려니 정말 시간이 부족하네요..

  4. 심지어 르네상스를 다룬 글에서도 카이사르 이야기가 빠지지 않죠. 이제는 에세이가 아니라 무협지를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어요. 13권의 압권은 제정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재능에 가장 근접했다 기번이 평가했던 한 남자에 대한 오버센스였어요.

    그나저나 학교 수업의 압박에 공부까지 하시려면 힘드시겠군요. 전 모처럼 봄을 맞아 친구들 몫까지 신나게 놀고 있답니다. 학생은 다음날 약속이나 주말 정도의 약속에는 강하지만 오래 기다려야 할 수록 변수가 많아지는 직업 같아요. 예측불가능한 사건과 레포트에 치이다 보면 장기 계획은 어긋나기 마련이잖아요.(마치 졸업한 듯한 말투인걸요^^)

    전 책값의 압박으로 CD구입 할 자원까지 소모한 터라 가을까지 공연은 꿈도 못꿀 듯 싶습니다. 대신에 봄에는 여행이랑 책에 집중하려구요. 오늘은 슬쩍 비가 내리지만 슬슬 봄이 되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이곳은 따스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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