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A Highlight, ARGONAUTIKA, 영국의 역사, 하트셉수트

MoMA Highlight
부끄럽지만 난 현대 미술에 문외한이다. ‘추상화 읽는 법’ 같은 실용 서적을 아무리 읽어도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꽤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는 화풍은 잡다하게 쌓은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신고전주의에 정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느리지만 차분한 걸음으로 시간을 뒤따라 걸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인상파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매너리즘에 숨겨진 근대성에 놀랐으며 몇해 전부터는 샤걀이 좋아졌다. 마티즈의 색채와 단순화 된 선에 응축된 역동성을 느끼고서야 현대 미술의 세계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딱 여기까지다.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지만 그보다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난 ‘형해화’란 단어를 더욱 자주 되뇌이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수백점의 작품가운데 내가 이해한다 착각할 수 있는 것들은 반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 미술을 논한 인문학적 수사로 화려하게 채식된 어떤 책보다 짧은 시간동안에 다양한 경험을 선사한 듯 싶다. 간결한 설명과 세심하게 추려진 작품들은 나처럼 어리숙한 쑥맥에게 흐름을 집어갈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 얇은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치고는 이정도도 많다. 더욱이 티 브레이크의 짧은 틈을 이용해서 즐기는 마음의 산책으로는 이만한 것을 찾기 어렵다.

Argonautika
오랫동안 난 아폴로니우스의 <아르고호의 모험>을 읽었다고 착각했다. 읽지 않았다면 황금 양모를 찾아 떠나는 이아손의 모험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할 것이며 영어 이름을 Jason으로 짓고 싶다던 친구의 편지에 쓴 웃음을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티쿠스에 게재된 아르고나우티카의 소개글을 보고 나서야 볼프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이나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읽기는 했지만 아폴로니우스의 서사시만큼은 읽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서 읽은 이야기로 대강을 짜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길고 긴 어느 겨울 저녁. 쉽게 꺼지지 않은 배부름을 핑계로 서가에 들린 친구와 난 십 년째 변하지 않는 가격을 자랑하는 자판기의 블랙 커피를 마시며 사방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목에 앉아 <아르고호의 모험>을 넘기기 시작했다. 물론 독서는 10분되지 않아 늙은 복학생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화사한 소녀의 등장으로 무너지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폴로니우스의 <아르고호의 모험>은 원전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지만 에우리피데스나 볼프가 보여주었던 치밀한 갈등과 주제 의식은 찾기란 어렵다. 그저 아이손과 메데이아를 축으로 전개되는 다른 이야기에 비해 다양한 영웅들에게도 시선이 미치고 있으며 아르고호에 승선한 영웅들의 고난이라는 고전적 주제에 충실할 뿐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위대한 비극적 원형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한 법이다.

영국의 역사-한울 아카데미판
옥스포드 영국사에 비해서는 가볍지만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보다는 디테일이 살아 있고 플랜테저넷부터 스튜어트 왕가에 이르는 시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사실 스튜어트 왕조까지만 다루고 있다 -이민족의 침략 시대에 성립된 고왕국들의 왕권 이동을 꽤나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과 셰익스피어의 사극을 이해하기 좋을만한 구성이라는 사실에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책은 역사책으로는 좋던 나쁘던 간에 역사가의 현실 인식이 담겨져 있지 않다. 처음부터 리퍼런스북으로 기획된 책처럼 영문학의 이해를 위한 시대상의 전달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서술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영국사 대부분이 이런 사실들을 common sense로 다루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외에는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는 책은 못내 지겹다.

하트셉수트
노블쿠르의 이 책은 성실함으로 이름이 높다. 사실 책장을 슬쩍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성실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성실함이 재미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성실함이 지겨운 순간도 분명 존재한다. 그녀의 <하트셉수트>가 그렇다. 비문 분석과 체계적인 조사를 통해 현실을 최대한 자세하게 복원하려 노력하지만 그렇게 복원된 사실은 예상외로 격정적이지 않다. 이집트의 역사를 다룬 수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걸 하트셉수트가 지니는 강력한 이미지가 되려 이 책에서는 반감될 정도다. 대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돌 속에 석화된 한 여자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초상뿐이다. 뭐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다. 작가가 연구하고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독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이 얼마나 흥미롭냐 하는 것이다.

[#M_ P.S. | less.. |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걱정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 속독 능력은 아직 기세가 꺽이지 않았으며 나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해야할 일을 회피할만큼 비겁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머리를 뉘일 쉼터도 없는 내가 나른한 기분으로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곳은 깊은 잠과 책에 불과하다. 쓸모 없는 불안 심리에 휩쓰려 큰 기복을 보이는 것보다는 안정된 효율성이 오히려 낫다. 하루 웃고, 하루 우는 것보다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편이 더 낫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비단 경제 모형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_M#]

2 thoughts on “MoMA Highlight, ARGONAUTIKA, 영국의 역사, 하트셉수트”

  1. 선언한지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걱정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첨부된 사진도 없으며, 개별적인 포스팅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에 충실하다는 반증이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life-style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라서 마음이 놓인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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