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r

월요일 오후. 졸지에 single이 되어버린 J군과 회합을 가졌다. 또 다른 J군의 청탁을 해결하느라 오전을 보낸 나는 세수조차 하지 못한 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의외로 담담한 녀석의 모습에 놀랐다.

불과 이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실연은 꽤나 진중하고 무거운 소재였는데 이제는 보는 사람이나, 당한 사람이나 모두 무덤덤하다. 시간의 횡포 앞에 굴복하지 않는 감정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삶의 교훈을 체득한 것인지 아니면 만남과 헤어짐의 일상성에 모든 감흥이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천연덕스럽게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 우리는 공부를 할지 영화를 볼지 심각하게 망설이다가 Closer를 빌리러 나갔다.

사실 Closer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Jude Raw와 Natalie Portman, 그리고 Julia Roberts가 나온다는 casting에 대한 사소한 정보 뿐이었다. 하지만 늘 그런 것처럼 타인의 해석에 오염되지 않는 영화는 꽤나 재미있다. Jude가 연기한 Dan이라는 캐릭터가 사랑이란 허구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나, 사랑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Dan의 캐릭터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을 거라는 예상이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며 흐뭇해 하는 것이나,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인간 심리의 빈틈을 솜씨 있게 짜 맞춘 Larry가 거둔 절반의 성공에 의의를 부여하는 나를 바라보는 것이나, Alice의 절제된 사랑과 Anna의 의미 없는 사랑을 관찰하는 일은 꽤나 다양한 재미를 선사한 듯 싶다.

그러나 사실 지금에 와서는 closer가 혹 원작이 따로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원작이 따로 있다면 영화에서 제대로 들어 나지 않는 인과율과 심리적 뉘앙스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을 텐데 극중에서 관객에게 전달하고 있는 사실은 거짓일지 모르는 진실과 진실 같은 거짓 뿐이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사이의 불확실성이 이 영화가 지닌 전부는 아니다. 잘빠진 Jude의 맵시와 투박한 Irish style의 Clive가 보여주는 매력이 이 영화의 나머지도 아니다. 지적이지만 그럼에도 약간은 천박해 보이는 캐릭터를 선보인 Julia와 스트리퍼라는 극중 직업에도 불구하고 아둔하기 보다는 단정한 매력을 선보이는 Natalie의 들어나지 않는 긴장 관계를 관찰하는 것이야 말로 이 영화에 숨겨진 진짜 재미다.

[#M_P.S. | less.. | Jude와 Julia가 함께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단정한 하얀 셔츠 속에서 더 두드러져 보이는 브라와 낯선 키스, Natalie와 Jude의 침실에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순진한 캐미숄의 대비가 꽤나 인상 깊었다. 지적이지만 약에 취한 코르티잔 같은 Anna의 극중 이름과 좁은 문의 알리사를 연상시키는 Alice의 작명 센스도 일품이었다. Actor보다 Actress의 연기가 더 뛰어났던 영화.

참. single이 되었던 J군은 영화를 보기가 무섭게 다시 couple이 되었다. _M#]

Before Sunset#2

[#M_ 프롤로그 | less.. |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기본적인 생존권마저 위협 받는 시험 기간에, 그것도 없는 시간을 쪼개 걸어준 전화가 반가웠지만 애써 내색은 하지 않았다. 사실 녀석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난 졸음과 사투 중이었고, 누군가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참 수업을 듣고 있을 친구 녀석들이 원망스러웠고 졸음을 유발하는 나른한 햇볕이 싫었다.

<공부는 잘 되어 가나?>
<응… 그럭저럭 이제 뭔가 보이기 시작했어. 넌 어때?>
<나야. 뭐. 여항 말로 토하기 일보 직전이야. 밤새고 나면 울렁거리는 그 기분 있잖아. 내 상태가 딱 그거야>
<도와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동네에서는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한참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이라 경영쪽으로 가겠다고 하던 것이 누군데? 넌 하얀 가운보다는 지금이 더 어울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건강하다니까>

한동안 할 말이 없었다. 지난 봄에 약속하고 지키지 못한 일들이 생각나 양심이 찔렸다.
<왜 말이 없어. 나한테 죄지은 것이라고 있나 보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지키지 못한 사소한 약속부터, 지킬 수 없게 된 또 다른 약속까지
<죄는. 내 양심은 약수에 넣어도 가라앉지를 않아>
<시험 끝나면 Before Sunset보러 가자. 22일 개봉이라니까. 시월의 마지막 저녁도 괜찮고…>
비포 선셋이라. 너하고 비포 선셋을 보는 것은 너무 위험해. 간신히 삶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그러다 다시 살아나면….
<사진보니 말랐더라. 맛있는 것 좀 뽀지게 먹고 다녀>
<어이구. 너도 그런 말 쓸 줄 알았나. 그나저나 싸이는 언제 시작한 거야?>

그렇게 대답을 넘겼다. 완곡한 거절의 의미라는 사실은 우리 둘 다 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감출 수 없다. 내년에는 말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줄게. 밤을 지새워 달라면 지새워 주고, 여행을 가자면 같이 갈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흔들리고 집착하며, 번뇌하고 싶지 않아._M#]
나이듦을 애석해 하다
아침 나절부터 음식 장만을 돕고 있었다. 화양전을 만드는 동안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비디오 플레이어에 비포 선셋을 밀어 넣었다. 텔레비젼 화면을 주시하며 주변을 둘러 본다. 막내 누이뿐이다. 결국 비포 선셋을 누이와 보게 되는구나란 생각에 쓴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둔감함과 무지로 무장한 뭇녀석들과 같이 보는 것보다는 그래도 누이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우리는 같은 세대이며 비슷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느 한 사람의 몰이해로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영화를 누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보았더라면 그것은 꽤나 위험한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채 기분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르고, 타인의 감상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이 기분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를 다시 인식할지도 모르겠다. 비포 선셋은 그런 영화다.

9년 동안 에단 호크도 늙었고, 누이 말처럼 줄피 델피의 몸매도 죽었으며, 나도, 누이도 모두 늙었다. 이제는 로맨틱한 사랑보다 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 한다. 쉽게 말해 사랑에 몸이 달아오른 그 누구도 없다. 자연스럽고, 편한 분위기, 우리는 그들에게 완벽한 공감을 표하며, 그들에게서 지나온 과거의 내력을 읽어낸다. 살면서 혹은 사랑하면서 한번쯤 경험했던 대화와 표정들. 비포 선셋을 보는 동안 생각나는 것들이다.

아니 에단과 줄리를 보면서 내 삶에 쌓인 시간의 두께를 절감한다. 그녀를 만난다면 나 역시 에단과 같이 말하겠지. I am so sorry. 여전히 그대로인 마음을 담담한 듯 말하며 상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농담과 진담을 모호하게 섞어가며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들이 어떤 사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처럼 과거와 같은 열의와 정열로 확신을 말하지 못하는 것 또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림처럼

비포 센셋을 보다 보면 익숙한 장면에 놀라곤 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구도와 장면, 유심히 기억을 되집어 보게 된다. 하지만 이내 익숙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 몸으로 직접 겪은 장면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림이구나. 파리의 풍경을 담은 수많은 그림들을 인덱스가 형성되며 영화 속 한 장면과 그림을 매치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효과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구분하기 어렵지만 머리속에 담긴 그림은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진다. 에단과 줄리의 쉴새 없는 대화만큼이나 배경은 많은 것들을 전달한다. 실사의 화면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들은 이내 그림 속에서 움직인다. 보이는 것은 유화 물감의 덧칠이 입혀진 캔버스이고 들리는 것은 어쩌면 미래의 내가 그녀와 나눌지도 모를 대화다. 시간은 역전되고 정지한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은 없지만 그것이 현실이며 내 삶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현실적이어서 마음 아프고, 아름답지 않지만, 또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아름다우며 공감하는 영화. 비포 선셋이 그렇다.

사실 이번에도 감독은 결론을 말해주지 않는다. 제시는 비행기를 탔을 수도 있고,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지난 9년 동안 그들은 서로의 뒷모습을 수 없이 바라봤을지도 모르고, 다른 상대에게서 상대방을 발견했다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그들의 염원일지도 모르며, 9년 전 하룻밤은 그저 하룻밤에 불과했다는 결정을 내릴지도 모른다.

제시가 말한 농담과 진담 가운데 어디까지를 믿어야 할지. 셀린느의 삶 속에 어디까지가 내숭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진 않다. 이 영화는 그들의 이야기이되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결론을 내리던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결론이 있으며 우리가 살아온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면 된다. 다만 다시 9년 후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현실적이면서도 행복한 그들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내 삶이 행복하기를 염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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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지난 연말 왕년의 [미래 소년 코난]의 멤버이자 [빨간 머리 앤]의 애청자였던 우리 형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를 보러 극장을 향했다. 형제가 들뜬 마음으로 극장을 향한 것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2] 이후 보름만의 일이었다. 사실 우리 형제는 함께 놀러다니는 것을 즐긴다. 함께 영화를 보는 것도, 함께 책을 읽는 것도, 구석진 작은 방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것도 모두 우리 형제가 즐기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어린 시절, 국경일 오후 무렵이면 방영되던 [미래 소년 코난]은 우리 형제의 애청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나이 차이가 제법나는 큰 누님은 맥가이버가 같은 외화물에 심취해 있었지만 나머지 누나들과 난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이 만화에 묘한 매력을 느꼈던 듯 싶다. 하지만 우리 형제의 주시청 프로그램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빨간머리 앤]. 늘 숨겼던 사실이지만 난 로보트 만화보다 [빨간 머리 앤]이 더 재미있었다. 어쩌면 [오 길버트!]라는 누님들의 외침 뒤에는 소리가 나지 않는 나의 [길버트!]가 늘상 따라다녔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 역시 앤을 따라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웠고, 책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를 읽게 만든 것도 모두 앤 셜리의 덕분이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코난이 하야오가 그린 것은 맞는지. 빨간머리 앤을 그린 작가가 하야오와 어떤 관계였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재패메이션에 대한 숭배의 시기는 덧없이 짧은 것이었고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수많은 사람들이 재패메이션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갈 수록 난 책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사춘기 소년에게 누구나 관심을 갖는 것은, 다시 말해 유별날 것이 없는 기호란 없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샴푸와 스팅을 좋아하던 것도, 워크맨에 폴로네이즈를 꼽고 다니던 것도 알고보면 듀스와 서태지에 열광했던 또래와 달라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재패메이션도 그와 같았다. 모르지는 않지만, 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모른 척하는 편이 더 멋지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편안했다. 혹평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 형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했다. 하울을 통해 난 붉은 돼지를 보았고, 멋쟁이 길버트를 발견했으며, 소피를 통해서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녀들의 흔적을 보았다. 음악은 듣기 좋았으며, 색감은 풍성했다.

그런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지금껏 하야오가 보여주었던 작품들과는 다르다. 선과 색은 유사한데 인물에게 부여된 캐릭터와 이야기의 전개 양식이 다르다. 하야오의 펜을 빌린 다른 이의 작품이라고 해야할까? 지금껏 그가 보여준 이야기의 연장선상이라고 하기 보다는 되려 몇십년 전의 하야오를 보는 기분이다. 하야오가 그린 환타지는 사람 냄새가 나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분위기가 풍기는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전과 다르다. 사람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느낌이 난다고 해야할까?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지 모르겠지만 이 노대가는 앞으로 미적거리는 걸음을 옮기기 보다는 큰걸음으로 뒷걸음쳤다. 하지만 큰 뒷걸음이 멈춘 곳은 태초의 사랑과 건강함이 묻어나던 시작점이었으며 멋진 벚꽃과 소녀들의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던 꿈이 남겨진 공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지난 수십 년의 시간이 이 노인을 힙겹게 만든 뒤에야 그는 미적미적 나아간 걸음을 후회하며 뒤를 되돌아 봤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나는 뒷 이야기를 궁금해 하며 다음주를 기다리던 그 옛날 소년의 마음으로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이런 나의 기다림은 예측력과 이해력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모범생 컴플렉스의 발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던 간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뛰어난 작가인 하야오의 작품이 아니라 탁월한 이야기꾼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구성진 말솜씨이다. 고민하는 대가보다는, 고민으로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예술품을 만드는 공장보다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꾼이 더 좋아진 것은 한 살을 더 먹은 나이 탓인지, 어려운 시절 탓인지 다소 구분이 어렵긴 해도 말이다.

Alexander

플루타크의 알렉산더 전기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단락으로 시작된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 두 영웅에 대한 사료는 그 방대함을 자랑하는데 때로는 그 방대함이 영웅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난 방대한 사료를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는 전투 상황과 일지에 연연하기 보다는 일화를 통해 영웅의 성격과 인물 됨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사실 플루타크의 변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알렉산더와 카이사르에 대한 인식만큼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전혀 좁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알렉산더를 젊고 방탕한 야만족의 정복왕으로 묘사한다. 혹자는 잘 교육 받은 우아한 전제군주로 묘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광기에 사로잡힌 독재자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며, 비운의 제왕으로 묘사하는 사람도 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다시 말해 나처럼 무엇이 진짜 알렉산더의 모습이냐 하는 문제가 전혀 중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상이 단지 흥미로울 뿐이다.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도 이런 관점으로 보면 꽤나 재미있다. 세 시간이란 시간이 한 다경으로 느껴질 만큼 영화는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대왕의 정신적 후계자로 인정 받는 톨레미의 나래이션으로 시작된 영화는 올리버 스톤이 조명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들어낸다.

제왕의 수많은 후계자들 가운데 왜 톨레미였냐고 묻지 말아달라. 파라오란 명칭으로 불리는 톨레미만으로도 올리버 스톤이 의도하는 바는 명쾌하다. 이제 관객은 초반부터 극명하게 들어 나는 감독의 의도를 따라 톨레미의 나레이션으로 이어지는 대왕의 여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올리버 스톤치고는 정말 친절한 배려다.

사실 인지하기 어려운 배려이긴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잇수스와 티루스, 이집트로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여정을 나래이션 처리함으로써 신의 아들 알렉산더가 아니라 인간 알렉산더를 다루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제우스 아몬의 아들이라는 신탁과 일련의 종교적 체험을 건너뜀으로써 그는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 속한 알렉산더를 그려낸다. 이 두 가지 배려가 있기에 영화는 한층 쉬워진다. 신이 되려는 사내가 아니라 인간으로써 그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업적을 뛰어넘으려는 자부심 강한 사내의 영광과 좌절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M_
가우가멜라, 페르세폴리스, 박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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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가우가멜라 전투는 지금껏 본 수많은 영화의 전투신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전투신이었던 것 같다. 포진이 끝난 뒤 전투 나팔이 울린 순간부터 다리우스의 전장 이탈로 전투가 종결되는 그 시점까지의 시퀸스는 작은 깜빡임 조차 허용하지 않을 만큼의 박력을 자랑한다. 우익을 본대(주력)로 지칭하는 대화나 페르시아 기병대가 전개된 그 틈을 이용해서 다리우스를 생포한다는 후세 역사가들이 대체로 의견을 같이 하는 작전 전개도 일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일사분란 한 진형이 갖는 압력이 잘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투의 사실성을 높이는 것은 이런 압력과 전투 개시 나팔이 울리기 전까지 병사들이 보이는 굳은 표정과 몸짓이다. 호플론에 왼손을 끼고 장창을 꼬나 잡은 마케도니아 밀집보병대가 임무가 공격이 아닌 모루라는 사실이 서글프긴 해도 말이다.(난 개인적으로 알렉산더의 캠페인에 대해서는 리델 하트의 분석을 선호한다)

그러나 전투의 승자가 된 알렉산더가 바빌론으로 개선 행진을 했다는 나래이션은 올리버 스톤의 조크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행정 수도가 수사였고,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의 약탈 명령과 방화로 불타 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잊혀진 옛 도시 바빌론을 통해 알렉산더의 광기를 피해 보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였다. 존재하지 않는 도시는 불태우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있다. 페르세폴리스가 아닌 바빌론이라면 불태우지 않아도, 약탈하지 않아도 괜찮다. 올리버 스톤이 그리려 했던 알렉산더가 코스모폴리탄 알렉산더였더라면 페르세폴리스 약탈과 방화는 그 상에 대한 부정적인 논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리우스를 쫓는 알렉산더의 추격에서 그는 꽤나 깔끔한 연출이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모든 이야기에서 다리우스의 죽음은 적에게 너그러운 알렉산더의 면모가 들어 나는 일화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너그러움에는 승자의 교만과 우월이 깔려 있다.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을 전투뿐만 아니라 인간미로도 압도했다는 그리스의 자부심이 흘러 넘치는 이 일화에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다리우스의 대사를 지워버린다. 죽음을 맞이한 왕과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왕 사이에서 왕좌와 망토가 교환된다. 짧지만 이 시퀸스는 공정하다. 그리고 패배한 왕의 죽음으로 영화의 전반부는 마무리 된다. 후반부가 새로운 지배자 알렉산더의 죽음으로 마무리 되는 것처럼._M#]
문체는 변하지 않는다
사실 극장으로 걸어가는 나에게는 세가지 걱정이 있었다. 하나는 표가 모두 매진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길함, 다른 하나는 가는 빗발이 언제 소나기로 변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맨 마지막 하나는 올리버 스톤이 만든 블록버스터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사실 지금껏 그가 만든 영화는 저예산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작자의 입김에 흔들릴 만큼 거대한 규모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력 있는 전투신을 끝으로 영화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문체로 쓰여진 희극으로 변했다. 사랑과 영광이라는 주제를 알렉산더와 주변 인물들과의 갈등을 통해 풀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다면 이 시점에서부터 관객의 평가는 양분된다. 지루하다는 의견과 세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으로 의견이 나뉘는 시점이 바로 이때다.

사실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제국이라는 역사가들이 일반적으로 설정한 대립 축이 아닌 사랑과 영광을 대립 축으로 설정한 감독의 이야기 전개는 역시 탁월했다. 대립 축이 페르시아로 설정되었더라면 페르시아 원정 이전의 두 번의 캠페인과 소아시아에서의 전투, 근동에서의 전투, 이집트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립 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군사적 재능이 탁월한 한 왕에 불과하다. 이런 대립 축에서 피 흘리고 좌절하는 영웅을 보여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구도였을 경우 감독은 상상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따지기 좋아하는 평론가의 탈을 뒤집어 쓴 고증 애호가들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심력을 소모했을지도 모른다.

[#M_ 오이디푸스와 메디아| ! |
하지만 이런 극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배우도 있었던 것 같다. 졸리가 연기한 올림피아스가 이런 경우다. 책을 읽는 듯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발음도 별로 였지만 올림피아스에 대한 캐릭터 연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녀는 이아손의 부인이었던 마녀 메디아가 아닌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그것을 얻지 못한 불운한 여인을 연기했어야 한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존경과 남편이었음을, 아들의 헌신적인 호의였음을 감독은 놓치고 있다.

졸리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감독은 올림피아스를 해석하는데 마녀 메디아를 택했다. 이런 선택은 필연적으로 필립왕의 암살을 내부자설로 몰아 갔고, 알렉산더의 즉위가 지극히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훼손한다. 알렉산더의 왕위는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지킨 것이기도 한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 부친의 총애를 받은 아들이라면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유명무실한 왕권을 얻기보다는 안정된 왕권 상속을 노리는 것이 더 전략적으로 현명하다.

사실 후세의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제기된 필립 암살의 내부자설에서 그것의 배후로 지목되는 사람은 모후 올림피아스가 아니라 알렉산더 그 자신이다. 그가 이집트의 아몬 신전에 청한 신탁에는 필립왕의 암살자들이 모두 신의 처벌을 받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 자신이 연루되어있다면 부친살해의 죄가 자신에게도 직접적 미치는지 알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오디푸스와 메디아를 등장시킴으로써 시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랑과 영광이라는 주제에 첨가된 부친 살해의 업과 처벌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훼손하고 불분명하게 만든다. 졸리라는 비싼 배우가 아니었더라면 조금 덜 튀는 올림피아스를 그려낼 수 있었고 부친살해의 업과 처벌이라는 자칫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사건을 배제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다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_M#]
[#M_ 록산느, 인디아, 세계 제국| ! |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는 평가를 받는 록산느는 사실 후세(정확하게는 BBC의 다큐멘터리)의 역사가들에 의해서나 언급된다. 고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록산느는 고작 한 두 문장에 불과할 뿐이다. 알렉산더 사후 임신중이던 마케도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은 록산나가 알렉산더의 정실인 스타티라를 처형했다는 대목이다. 정치적 중요성을 토대로 사건의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고대 역사가들에게 록산느는 말 그대로 대왕의 사생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록산느는 헤파에스티온과 함께 올림피아에 대한 대척점을 이루며 사랑에 대한 알렉산더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극에서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역사에서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인물들이 바로 올림피아스 반대편에 위치한 이 둘이 아닐까 싶다.

<세계사 편력>에서 네루는 알렉산더의 인도 원정에 대해 그의 딸 인디라에게 이런 톤으로 설명한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조차도 인도의 지방 참주에 불과했던 포루스를 이기지 못했노라고. 알렉산더가 인도를 이긴 것이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는 인도인들이 멀리 서 온 정복자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승리로 오해한 것이라고. 알렉산더가 점유한 지역은 인도가 아니라 인도의 변경에 지나지 않노라고. 알렉산더가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코끼리와 기마술로 무장한 인도의 정규군을 이겨야 했노라고. 강대한 전성기의 페르시아조차 넘보지 못했던 인도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운다면 상승의 알렉산더조차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이렇게 말한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네루가 딸에게 쓴 이 편지가 떠올랐다. 당시의 인도인들은 드라나다족이 아닌 백인이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피부색을 근거로 이루어지는 알렉산더에 대한 비난은 애당초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미개인을 연상시키는 인도인을 통해 오히려 세계 제국의 열망 하나만큼은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_M#]
알렉산더의 열정은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차분하게 마음 속에 스며든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쫓는다. 영웅도 이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후세의 우리는 그 누구도 알렉산더의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의 실패가 필연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필연적인 실패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은 인간의 특권이다.

사랑도 영광도 어느 것 하나 충분하게 얻지는 못했지만(물론 알렉산더가 생각하기에 말이다) 알렉산더는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라는 씨앗을 우리에게 남겼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것처럼. 신이 아닌 인간이 30여년의 짧은 운명으로 선사한 것 치고는 원대한 희망이다.

사실 스톤의 시나리오는 매우 정확한 인용을 자랑한다. 대화의 대부분은 역사에 기록된 실제 알렉산더의 말이다. 극의 흐름에 따라 의외의 장소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극적 형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지금껏 알려진 역사에 충실하다. 다만 신화의 과도한 인용만큼은 마음에 걸린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상징의 수는 제한이 있는 법인데 그는 알렉산더에서 다소 과도한 상징을 인용했다. 이 점 만큼은 그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려한 볼거리가 없더라도 난 그의 알렉산더를 즐거운 마음으로 즐겼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숨이 막힐 듯한 박력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아이스킬로스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올리버 스톤판 알렉산더를 보러 간 것이기 때문이다

나비효과

[#M_ Intro | Intro |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영화를 볼 때면 대한극장으로 향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총애를 받던 MMC는 교통혼잡으로 선택항에서 소거되었고 한 두 정거장 차이지만 서울극장의 커플석은 꽤나 부담스럽다.(무엇보다 허리를 쭉 펴면 뒷자리의 원성을 엄청 들어야 했다) 결정적으로 태양이 중앙광장에 따갑게 쏟아 내리던 과거의 어느 오후 분수대 벤치에서 잡히던 미약한 무선랜의 시그널로 로드할 수 있던 홈페이지는 대한극장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습관적으로 지난 월요일에도 대한극장을 향했다. 어린 시절에는 영화에 집중하느라 물도 마시지 않았던 나였는데 어느 사이에 극장 오른편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쥐포를 산다. 사실 이런 버릇의 연원은 지선군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양이 대를 이어 예외를 습관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극장에서 무언가를 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옆 자리에 앉아 혼잣말을 궁시렁 대는 WC군이나,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이 나올 때 쥐포를 질겅질겅 씹는 나나 효용은 무차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_M#]
Butterfly Effect
Butterfly Effect라는 단어가 우리의 상식에 진입한 것은 90년대 중엽으로 기억된다. 나의 십대 중반에 해당되는 그 무렵에는 이미 엔트로피와 카오스는 과학에 관심이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복잡계 이론은 과학을 넘어 다른 학문에까지 침투했다. 그리고 십년이 흐른 지금에는 영화의 제목으로 쓰이며 감독의 의도를 풀어내는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나비효과>의 제목이 다른 것이었더라면 영화는 상황을 설명해줄 몇 가지 부연 설정과 에피소드를 삽입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비효과>란 제목과 하나의 인용문으로 감독은 관객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키며 러닝타임 단축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어 내고 있다. 게다가 왠지 쿨한 감각상의 느낌을 갖게 만든다. 약은 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약은 수 치고는 효과가 꽤나 괜찮은 것도 사실이다.

Retroactive
하지만 <나비효과>를 보면서 든 생각은 <레트로액티브>의 리뉴얼 버전이라는 생각뿐이다. 두 영화에는 7년이란 시간차가 있는 만큼 플롯과 설정은 조금 다르지만 본질은 똑같다. <나비효과>는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되돌아가 새로운 삶을 엿보는 버릇의 영감이 되어버린 <레트로액티브>의 이란성 쌍둥이 동생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키 크고, 잘생기고, 어리숙하기까지한 애스톤 커쳐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레트로액티브>쪽이 더 재밌다.

<레트로액티브>의 핵심은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냉엄한 교훈이다. 때로는 상황이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운명은 상황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이라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늘 (혹은 거의) 똑같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죽게 되어있고, 살 사람은 살게 되어있으니까 가던 길 가시오>> 수많은 반복 끝에 주인공 남녀가 깨닫는 교훈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 하나는 사막이라는 배경 설정을 통해 등장 인물의 행동과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를 도입했다는 사실이고, 늘씬한 금발의 심리학 전문가와 다분히 변태적인 사내의 미묘한 상황 전개를 통해 너절한 섹스 코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납치일기>에서 강간의 가능성이 르포르타쥐를 이끌어 가는 한 축인 것처럼 레트로액티브에서도 흠잡을 때 없는 미인과 능구렁이 같은 변태 사내의 성교 가능성을 암시하는 대화가 지루함을 방지하는 한 축이다)

상황을 넘어 삶에 도전하다
<나비효과>는 상황이 아닌 삶에 도전한다. 무대도 사막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아니라 활짝 열린 계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작은 상황 변화만으로도 인생은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상황이 아닌 삶을 통째로 바꾼 만큼 스케일의 변화는 크지만 치밀함은 부족하다. 그리고 치밀함이 부족한 만큼 중간중간 인과율과 동기가 모호해지기 쉽다.(사실 나비효과는 극단적인 인과율과 동기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비효과>는 이번만큼은 진지해진 애스톤 커쳐와 예쁘지는 않지만 시선을 떼긴 어려운 에이미 스마트를 내세워 이런 빈틈을 메운다. 재미있기는 하지만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진다는 평은 사실 이런 시나리오상의 허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나비가 날아 올라 폭풍이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나비가 난다고 태도가 그리고 태도에서 비롯된 동기가 변한다는 절대적 확신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순간의 선택을 통해 삶과 태도가 변한다는 사실을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삶과 태도에 느끼는 지속성은 상당히 강하다.

박력 있는 시퀸스 전환에 깜짝 놀라던 하나양은 이내 점퍼로 눈을 가릴 준비를 한다. 궁시렁의 명수 WC군은 오늘따라 조용하고 까마듯한 제대를 기다리고 있는 정섭군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난 오늘따라 좁게만 느껴지는 좌석을 탓하며 몸을 왼쪽으로 기대에 보았다. 실상은 좌석이 좁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답답한 것이었다. 21살 봄과 23살 여름이 마음 속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이 21살 봄을 선택했겠지만 지금의 난 23살 여름에 더 끌린다. 전부 花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