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군에게 놀러가다

월요일 아침. 침대
7시에 일어났다 다시 잠들었다. 어머니께 5분만 더 자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밤새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모기 한마리때문에 이불 속으로 전신을 숨겼다가 생각이란 마물에 사로잡혔다. 주기적으로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내 마음 가장 정직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설명하자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잠들지 못한 내가 보일 따름이다.

월요일 오전. 기차
간만에 기차를 탔다. 옆자리 사내 녀석의 잠꼬대가 불쾌했지만 원철군을 만난다는 마음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참아 주었다. 나중에 담배 한갑과 라이터를 들고 나간 녀석은 30분 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니코틴 부족에 따른 정신적 불안이 잠꼬대를 통해서 발현된 것이이라. 녀석은 조치원에서 내렸다. 흐릿한 눈과 힘없는 걸음걸이를 보면서 측은한 마음이 잠깐들었다. 새하얀 얼굴과는 달리 삶에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 아니면 새하얗게 질려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월요일 정오가 약간 지났을 무렵. 천안역
원철군과 만났다. 몸 어딘가에 붉은색을 걸치고 있을 거란 예상대로 빨간색 셔츠를 입고 나왔다. 근래들어 청바지도 자주 목격된다. 두달만에 본 것이지만 어제 본 것처럼 익숙한 걸음으로 합류해 터미널쪽으로 방향을 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역전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비껴보고 물을 판단해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버릇같다. 꽤 봐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척박한 시골에 적응하다보니 저런 곡선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하는구나.

느릿한 걸음으로 담소를 나누며 2킬로미터쯤 걸었다. 도중에 왠 여교(학교 이름이 복자였다)에서 원철군이 이상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사연이 있는 학교같다. 나한테 이야기하지 못한 첫사랑이 다니던 학교였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상상하면서 키득거렸다. 원철군은 지금도 학교 이름때문에 웃은 줄 안다. 우리를 모두 아는 그녀의 말에 의하면 멀리서 들어도 단번에 알 수 있다던 두 남자의 이상한 웃음 소리(혹자는 울음 소리라고도 한다)가 인적드문 거리를 매웠다.

월요일 점심. 시간(야우리란 이름의 백화점 6층. 식당)
언더월드를 예매해 놓고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원철군에게 심심하다 투정부렸다. 다 네 놈이 나를 버리고 군대를 갔기 때문에 내가 이리 심심한거라고 윽박질렀다. 지난 토요일 우리가 조금 싫어하는 찜닭을 먹은 이야기와 설탕물만 좋아하는 원철군이 시도한 아메리카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이들과 내가 슬램덩크 완전판을 보니라고 바쁜 사이 원철군은 재미난 시간을 보낸 모양이다. 토요일을 이야기하는 녀석의 표정이 밝기만하다. 커피도 마셨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내가 여전히 민트 초쿄칩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월요일 저녁에서 화요일 새벽까지. 원철군의 집
원철군의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먹었다. 근래들어 식사량이 줄었음에도 두 그릇이나 비웠는데 원철군은 조금 먹는다고 구박이다. 군것질도 안하고 하루에 두끼만 먹는 나로서는 있는 힘껏 열심히 먹었는데 녀석은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예전에 둘이서 밥 한솥을 다 먹은적도 있으니 나의 부진에 놀라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무튼 같이 영웅을 보고나서 오랜만에 플레이 스테이션1로 게임을 했다. PS2가 범용 콘솔로 자리잡은 오늘날로서는 골동품인 콘솔이지만 항상 그렇듯이 골동품에는 추억이 담겨져 있는 법이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요구로하는 롤플레잉 타이틀도 눈에 띄었다. 가장 놀란 것은 피파99의 타이틀. 본인은 수능이 끝나고 샀다 주장하지만 19살 한여름밤을 같이 했을 추억의 타이틀로 사료된다. 하지만 원철군의 방에서 발견한 것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엄청난 시디와 재패메이션 비디오 테이프, 혹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컬렉터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재력이 소모된다. 무엇보다도 그 시간에 컬렉터가 고등학생이라면 이야기는 사뭇 심각해진다. 원철군. 자네나 나나 떳떳하게 ‘공부 잘하는 인간이요’ 이렇게 말못하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듯 싶다.

내가 서점에 갈때마다, 도서관에 갈때마다 언제 읽었는지조차 모르는 책들에 놀라는 것처럼, 그리고 그 시간에 공부를 했으면 사뭇 인생이 달라졌을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현재에 만족하는 것처럼, 원철군도 그렇게 만족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면 정말 후회가 된다면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소재들을 지니고 있을리 만무하니 말이다.

내가 지금껏 받은 선물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다고 술회하는 은제 펜촉에 대하여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초희에게 미안하지만 그것을 볼 때마다 그리운 마음과 불우함을 느끼곤 했었다. 결국 어느 해 겨울 도서관 열람실에서 파커 블루 잉크병과 펜촉을 보기좋게 정리해놓고 한참동안 자리를 비웠다. 내 손으로 버릴 수 없었기에 고통스럽던 그 물건은 그렇게 내 손을 떠나갔다.

사실 원철군의 방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PS의 타이틀도, 엄청난 시디와 비디오 테이프도 아니었다. 바로 나와 원철군의 모습이 담겨진 사진첩이었다. 지선군의 얼어죽기 일보 직전인 포즈와 어리다는 느낌이 물씬 품겨나오는 표정을 보고있으려니 시간이 덧없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 착각하지만 옛 사진은 그런 착각을 여지없이 부셔버린다. 원철군이나 나나, 지선이나, 우리 모두 나이를 먹어버렸다. 옛 사진 속의 모습이 앳되다 생각될 정도로…

그러고 보니 나만 사진을 곁에 두지 않고 있었다. 지선군의 집에서도, 원철군의 집에서도 같이 찍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난 그 사진들을 서랍 속 깊숙히 보관만 하고 있다. 휴 반성하자. 그리고 액자를 사자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