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때는 2004년 4월 28일 수요일 원철집에서 뒹굴고 있다. 지선양의 주량이 너무 감소한 까닭으로 술자리가 너무 빨리 파했다. 두 배는 더 달릴 줄 알고 기대했는데…

아주 오랜만에 교정을 거닐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이렇게 걷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낯선 일이 되어버렸다.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 특별한 목적을 지니고 와야 하는… 이곳을 매일처럼 걸었던 그 때가 조금 그립다.

생각해 보면 그리 먼 과거는 아닌데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은 멀게 느껴진다. 마치 불청객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안도감도 느껴진다. 내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니라고. 어떤 의미에서 난 되려 빠를 지도 모른다고…

옆에서 원철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궁시렁 거리고 있다. 간만에 들어보는 궁시렁이 너무 정겹다. 우리가 이렇게 궁시렁 거렸던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정말 오랜만이다. 마음 한가득 편안함이 스며든다.

비록 교양관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지는 않았지만, 비록 다람쥐길을 걸으며 예쁜 아낙을 훔쳐 보지는 않았지만, 사대 뒷편에 앉아 시간을 때우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즐겨 이야기 했던 SPSP도 사라진 교정이지만 그럼에도 고향에 온 듯한 아늑함이 느껴진다.

29일 아침이다. 내가 한참 학교를 다니던 그 시기에 휴가를 나온 원철군은 늘 잠에 취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하곤 했었다. 난 늘 듣기 싫은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고, 점심 무렵 417버스를 타고 내리는 녀석은 늘 12시 반이 되서야 도착하곤 했다. 늦잠쟁이… 그런데 오늘은 입장이 정반대로 변했다. 녀석은 주섬주섬 일어나 듣기 싫은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고 난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원철을 놀려 댄다. 학생이 일찍 일어나서 수업을 들어가야지 하고…

한밤중에 원철군이 깔깔대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메신저에 로그인 해놓은 채 잠들었는데 혹 어떤 폭탄이 나를 사모하는 마음을 원철군에게 잘못 고백한 것이 아닐까?

밤새 원철군과 블로그를 다시 읽었다. 미묘한 심리 설명과 함께 저자 밖에 모르는 각종 암시까지 설명하고 나니 마음이 개운하다. 지금 말해 놓지 않으면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하루라도 빨리 알려줘야 겠다고 마음, 또 마음 먹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아침이다. 느릿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어제 미쳐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을 해야겠다. 그리고 간만에 영화도 보아야지. 원철군과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지도 어느 사이에 한분기나 지나버렸다.

참. 반 년여 만에 보았다. 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내가 이상스럽지만 아무튼 반 년여 만이었다. 반 년 사이 난 엄청 늙고,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여전히 그대로다. 여전히… 아주 먼 옛날의 기억을 살포시 검색해 보았는데 내가 황홀해 했던 그 무엇이 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정확하게는 감도 못잡겠다. 너무 편리한 기억력이라고 비웃어 본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그런 범인과 점점 똑같아 지는군. 보고 싶지 않은 진실까지도 눈을 뜨고 봐야하는데 아무래도 안경을 수리점에 맡긴 타격인가 보다…

Modify(2004.5.1) 이런 생각이 든다. 너무 서먹하다고, 최소한 14개월 전의 우리는 정말 친근한 사이였지 않은가? 나한테 서운한 감정이 있다면 잊어 주기를… 내가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면 반성할테고, 바꿔야 한다면 바꿀테니까. 하지만 정말 이런 서먹한 사이는 싫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유쾌하고 가벼운 것이 좋아져. 다른 무거운 주제들이 쉴새 없이 빈틈을 노려올수록. 그런 열망은 커져만 간다네.

변한 것이 정말 나혼자라면 나 혼자만 기억과 시간을 14개월 전으로 되돌리면 되는 문제일테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단지 그것만은 아니라고 우물거린다네. 그러니 나한테 아량을 베풀어 달라고. 아량과 관용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는 것은 삶의 선량한 기쁨이 되는 법이야.

비록 예전처럼은 아니겠지만, 예전처럼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괜찮았던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4 thoughts on ““There””

  1. 학교에 나오길 잘했단 생각만 드는구나.
    정경대에서 경영대로 오는 사이에 국제관 앞에서 ‘아가씨’ 바로 옆을 지나쳤지.
    부르려고 했는데 친구들과 함께 있어서 그냥 전화했다.
    귀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내 마음이 달려있더군. ^^
    아, 이것은 일종의 ‘염장’ ㅋㅋㅋ

  2. 옆에서 보지 마시지?
    많은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관찰력을 지녔다고 자신했는데
    자네의 그 ‘아가씨’앞에서는 소용이 없더군.
    너무 낯선 사람이라 분류조차 힘들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좋은지 싫은지 조차 모르겠구.

    하지만 24살이 되니 20살 처자가 정말 예뻐보이더군.
    아무리 우리 학교 물이 조금 괜찮아졌다 그러지만
    고대에서 보기 힘든 미인이었어.

    아마 자네의 마음이 통하게 되는 날에는
    MJ의 염장질은 애들 장난이 될 듯 싶군.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최대한 방해를 놔야겠지.

    참. 오늘 저녁 영화 볼 때 잡은 기회를 버린 것은 정말 피곤해서 일까?
    아니면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일까? 모르겠지?

  3. 녀석 정말 많이 피곤했군.
    눕자마자 코까지 골면서 잠들 줄이야.

    양심의 가책을 받았기도 했고, 정성을 쏟으려는 사람도 있는 데다가
    피곤하기까지 해서 특유의 귀차니즘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솔직히 나올 때 ‘고맙다’라는 말 정도는 했어야 했는데…

    다시 내일이면 자네는 떠나고 홀로 남겠지.
    자네가 있으면 고민이 ‘거의’ 사라지는데, 자네만 가면 나약한 인간이 되버린다.
    이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지만,
    포트폴리오에서 항상 실패를 한 내게 있어서 어서 그녀와의 관계가
    명확해졌으면 좋겠어.
    자네가 옆에 있을 때는 ‘무적’이 되지만,
    역시 혼자 있을 때는 ‘불능’이 되는 듯.
    자네와 함께하는 지금의 시간이 매우 행복하네.
    그럼 Sweet Dream~ *^^*

  4. 코까지 골다니… 엄청 피곤했나 보군.
    어제밤에 자네에게 무언가를 보여준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후로는 의식이 통째로 사라졌어…

    어제는 생각보다 힘든 하루였던 듯 싶어.
    너무 편한 삶을 살다가 갑작스레 고민이 늘어나기도 했고,
    나로서도, 내 능력으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란 정말 외면하고 싶은 것이거든.
    하지만 늘 그렇듯이 절반쯤 외면하고 절반쯤은 개입하겠지.
    외면과 개입의 컴포지션이 가장 효과적인 순간을 찾아서…

    그런데 말이야. 이틀의 휴가를 보내고 났더니 공부가 더욱 절실하게 하고 싶어져.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정말 즐겁거든. 고민도 없고, 나 이외에 다른 것들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이제는 진지하게 인정할까 생각 중이라네.
    쉽게 변하는 마음에 대한 자책감으로 또 다시 기회를 놓치기는 싫어…

    이번에 내려가면 한동안 올라오지 않을 듯 싶다네.
    최소한 두 과목은 끝내야 올라오겠지. 하지만 가능하면 두과목을 끝냈기 때문에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보기 위해서 올라왔으면 좋겠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모르겠어.
    한 때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너무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이 감정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 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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