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실체란 무엇일까?
누이의 블로그를 보면서 문뜩 난 미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머리 속에 들어 있긴 하지만 내 미적 수준은 그리 높은 것이 아니다. 백과사전파라고 해야 할까? 그림을 보는 순간 누구의 그림이라는 것은 기억 난다. 하지만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색채와 붓터치, 소재를 통해서 읽어내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가슴으로 느끼는 미감이 아니라 기억력으로 복원시키는 가짜 미감이다.

드가의 무용하는 소녀의 입상을 보면서 막내 누이가 느낀 절망감 혹은 자괴감이 무엇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친 질감의 재료를 가지고도 저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가다움에 받치는 경외감인지 어떤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가끔 신이 나에게 주지 않은 것들을 생각해 본다. 미술과 그림, 그리고 운동 신경만큼은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신이 밉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넉넉하게 주지도 않은 신이 밉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린 시절 음표를 읽어내는 친구들이 못내 부러웠던 것 같다. 음정과 음표를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능력을 가진 친구들이 부러웠고, 수학적 방법을 통해 조옮김과 박자를 계산해 내는 내 자신의 초라했던 것도 사실이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형체를 하얀 종이 위에 투사시키는 재주에 경의를 표했던 적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부러움의 이면에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던 듯 싶다. 아무리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글과 조우했을 때의 답답함과 남들은 쉽게 오가지만 나는 느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 이 두 감정이 복잡하게 섞인 것이 바로 내가 느꼈던 동경이었겠지?

백양사

시정군 홈피에 갔다가 반전 처리된 백양사의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갑자기 20살 홀로 떠났던 당일치기 여행이 떠올랐다. 시원한 물에서 탁족을 즐겼던 나른하던 한 때와 갑작스런 반전 모두가 말이다. 마치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고, 갑작스레 영혼이 바뀐 것처럼 느껴지던 그 이질감. 그리고 이질감을 부셔트릴 정도로 날카로왔던 통증이 기억 났다. 냇물을 따라 점점이 떨어진 피는 펴져 나갔고 긴 혈선이 어디까지 흐르나 응시했던 기억도 났다. 그리고 여행 다음날 쓴 글도 떠올랐다.(싸이의 미니 홈피에도 올려놓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중..)

하지만 사진을 보면서, 머리 속의 기억이란 기억은 죄다 뒤져 사진을 찍은 위치가 어디일까 가늠하는 나를 보면 확실히 미친 것이 틀림없단 생각도 든다. 집이 남쪽인 까닭으로 남도땅 가운데 밟지 않은 땅이 드물긴 하지만 이 곳처럼 머리 속에 많은 기억이 남은 곳은 없는 것 같다.무슨 까닭,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법 오랜 시간동안 기억 속을 탐험했지만 유력한 후보지 조차 골라내지 못했다. 감이 잡히는 곳이 있긴 한데 그 곳은 사진을 좌우로 역전시켜야만 비슷한 모양이 나온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길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혹여 내가 모르는 반대편 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M_ 그 날 있었던 비자발적 헌혈에 관하여| 어딘지 그로테스크 하지 않아? |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차가운 바람이 슬슬 옷소매를 스치고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가끔 가을 밤을 같이 할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밤쯤 친구를 위해 잠을 팔아버릴 친구가 말이다.
그래 사람이 친구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난 요즘 그 벽을 실감하고 있다.
어떤 불안감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아니 피곤이 불안감을 낳고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새벽 3시에 갑자기 잠을 깨곤한다.
싸늘한 한기가 유리창에 서리고
이웃집 창문에는 낯선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둠 속에서 초침 소리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할 정도로 적막한 방 안.

때때로 글씨를 쓰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른손의 집게손가락이 불규칙적으로 흔들리면서
낯선 자의 필체가 노트 위에 번진다.
내 영혼이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낯선 도시의 낯선 거리에서 친밀감을 느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여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반대로 과거의 단짝 친구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의 이름이 귓가에 울릴 때 아무 느낌이 없다.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이상스런 빛이 보인다.
거울 뒤에 도사린 나의 모습에서 과거가 보이지 않는다.

할로윈의 앨범을 듣고 있는 내가 보인다.
예전의 난 그 앨범을 들으면 구역질이 나곤했다.
악기의 흐름이 너무 격렬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꺼리낌없이 그들에게 열중한다.
책이 싫어진다. 음악이 나를 사로잡는다.

어느 날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난 어느 버스안에 있었다.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직행버스 안에는
등산복의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반 시각이 지났을 때 버스는 백양사에 도착했다.
아 옛날에 소풍을 갔었던 곳이다.
이곳은 내게 낯선 장소가 아니다.
역시 지금까지의 변화는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난 어느 여울에 발을 담가 놓았다.
차가운 물살이 발끝에서 머리위로 올라왔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평화로움이 좋았다.
문득 여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보통 키에 하얀 얼굴을 지닌 창백한 남자다.

내가 아니다.
발로 여울에 새겨진 모습을 지운다.
다시 여울을 바라본다. 두려움이 나를 감싼다.
다행이 여울에 비치는 모습은 원래의 나이다.
물에서 돌냄새가 난다. 약간 차갑고 아찔한 향이 콧속으로 밀려온다. 익숙한 향기다.

무얼까? 이 것은,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과 같은 향기다.
어느 사이에 발이 찢어진 것이다
아마 모난 돌을 밟은 모양이다. 어쩌면 유리에 찔렸을 수도 있다.
피가 번져가는 여울 속에 웃고 있는 그 남자가 보인다.
투명한 물결에 퍼져가는 핏방울은 한 줄기 선으로 그를 쫓아간다.
어쩌면 난 더 이상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_M#]

2 thoughts on “잡담”

  1. ‘나는 없어도 돼지만, 자네는 필요하겠군’
    아까의 말을 곱씹어 보는 중일세.
    최근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는 중이야.
    함께 살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와는 반대로 다른 이에 대한 생각은 자네와 비슷하게 굳혀져 가는 듯 하고.
    블로그를 주시해 주게나. 위의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을 테지만…

  2. 잘 읽어 보았네.
    조금은 걱정되던 바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어쩌면 가장 든든한 원군이 되줄 수 있는 존재를
    한때의 치기로 잃어버리는 사람이란
    신에게서도 운명에게서도 버림 받은 가련한 영혼이지.

    가련한 영혼은 동정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난 그마저도 외면하고 싶네.
    알다시피 나에게는 이유와 여유 모두 없지 않겠는가?

    가끔은 나 역시 변신을 하고 싶어져.
    스스로의 행동을 규율하는 약속만 아니라면
    나란 사람이 이런 인내를 강요당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야.

    될 수 있으면 자네의 변신을 말리고 싶긴 하지만
    언제인가 녀석의 경박스러움이 화를 부르고 말겠지?

    P.S. 난 가족의 품안에서 있기에 옵션이지만
    자네의 다이나믹한 혹은 건전한 삶을 위해서는
    누구라도 좋으니 한 사람쯤 필요해 보인다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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