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여름이 끝나버렸군

이번 여름이 시작되면서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들이 몇가지 있다. 두번의 콘서트를 신나게 즐기는 것, 두 번의 사진전과 두 번의 미술전을 보는 것, 그리고 economy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모든 재고 도서들을 머리 속에 집어 넣는 것. 마지막으로 봄보다는 나은 사람이 되자는 것, 이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한 일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타인과의 약속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이행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스스로와의 약속은 절대 어길 수 없는 무엇이 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상황을, 혹은 변명하는 상황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로서는 약속을 어길 방법이 없다.

사실 지금껏 여름에 공부를 해본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평균보다 아주 약간 나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고, 기억력은 그보다 조금 좋은 나로서는 어린 시절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쉽게 [공부 잘하는 학생]이란 평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꿈과 야망이 커질수록 경쟁의 질과 치열함은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내 경우에는 지적 능력의 감퇴를 가져오는 군생활이 4주 훈련으로 대체되었고, 남은 2년 동안 휴학생 같은 기분으로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물론 해외 여행도 안되고, 이런 저런 제약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기회비용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들이다) 불안감 초조함에 시달리며 졸업이냐, 시험에 붙느냐, 혹은 군대에 다녀오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달리 나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있다.(뭐 고등학교 친구들은 거의 제대한 분위기인데 대학 친구들은 반반이다)

졸업까지는 38학점이 남았고, 자유로운 신분으로 복귀하기까지는 15개월 반이면 충분하다. 대략 세 학기 정도의 시간인데 이 시간동안 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쓰고 싶은 것들도 충분히 쓸 수 있다. 나에게는 소중한 시간을 갉아먹을 애인도, 돌봐 주어야 할 피보호자도 없다. 모든 시간과 자원을 나 하나만 계발하는 데 투자해도 날 비난할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은 시간이 부족해서 노력이 부족해서 내 삶이 이렇게 무너져 버렸다고 하소연하는 못난이 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행운이 부족해서 잠시 멈출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나 노력처럼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주저 앉는 의지력 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불가항력이 아닌 이유로 실패를 자인하는 것은 정말이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24살 여름은 바다도 산도, 시원한 계곡도 보지 못한 채 이렇게 끝나버렸다. 얻은 것은 몇천 페이지에 걸친 지식과 경험. 잃어버린 것들은 나빠진 시력과 몽당 연필이 되어버린 스태틀러 한 자루다. 아니 잃어버린 것이 또 있군.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내 젊음, 화려하고 방탕하게 놀아도 아까울 젊음인데 이렇게 의자에 매인 몸으로 보내버린 것 같다. 아까워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 아쉽기는 하다. 사실 [조금] 보다는 [조금 더] 아쉽다.

2 thoughts on “이렇게 여름이 끝나버렸군”

  1. 미안하군.
    좀더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데, 그만 쓰러져 버려서.
    다행히 잘 도착했다니 마음이 놓이네.

    동문회장직을 맡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여자들과는 ‘일’문제로 부딪히기 싫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2학기의 시작인데
    예습도 전혀 안 하고 잠만 자버렸어.
    투자론 정도는 보고 수업에 들어가야 할 것인데..
    참, 사물함 신청에 떨어져 버려서 상당히 짜증난다.

    다음주도 즐겁게 보내시게.!!

  2. 미안하기는 내가 더 미안하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항상 시간에 쫓기는 것 같다.
    아무말 없이 벤치에 앉아 책이나 읽으며 쉬던 옛날이 조금 그리워.
    교양관 앞에서 먹던 아이스크림도 그립군.
    소강당 벤치에서 마시던 데자와도 그립고.

    아무튼 아침에 집에와서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한달동안 쌓여 있던 눈가의 피곤함이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어.
    이런 저런 사탕같은 노래들.

    거울을 보고 있자니 너무 밝아진 내 얼굴에 내가 놀랄 정도야.
    물론 여기 저기 미움 한번 화려하게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컴플렉스에 굴할 내가 아니잖나? 그리고 그런 미움 정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거든.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아니니 말이야.

    아무튼 오늘부터 나의 가을 시즌은 시작이야.
    간만에 행정학 좀 보려구. 추석전까지는 끝내고 싶은 소망이 있는데
    아직 확언을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추석 끝날 무렵에야 가능하겠지?

    그나저나 앞으로 배는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 중이야.
    내 각오, 내 노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은연중 내가 가지고 있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무척이나 싫어졌어.
    왠지 나약해 보였고, 불확실하면 확실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어?

    아무튼 자네의 친구 익군은 평화, 안정, 행복감
    그 자체를 맞보고 있는 중이네.
    내 삶에 신이 내려준 선물 하나가 늘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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